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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십여 년 전에 조카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제가 축의금을 받는 일을 돕고 있었는데, 조카가 장관 비서실에 근무한 탓이라 그런지 하객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하객들은 줄을 서서 차례차례로 축의금을 내곤 바로 식장으로 들어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분은 축의금을 내고는 그냥 그 자리에 서 있더군요. 그래서 제가 올려다보니 그분 말씀이 "나, 누군지 몰라?"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요.

제가 십 년 동안 유학을 하고 막 귀국했기 때문에 국내 사정에 어두워서인지 그분이 누군지 몰랐습니다. ‘모른다’고 하니까 그분은 "나, 장관이었어!"라고 하시더군요. 아마 조카가 근무하던 시절에 장관이셨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가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드렸는데도, 그분은 자리를 뜨지 않고 다시 묻더군요. "그런데 정말 나, 몰라?"라고 말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참으로 우울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니 어떤 직위의 사람인지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확인해야만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일 테니까요.

오사카 난바에 작은 우동집이 하나 있습니다. 하루는 노신사가 들어와 우동을 맛있게 먹다가 갑자기 수저를 놓더니 계산대로 갔습니다. 우동집 사장이 의아해하니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그렇소"라며 서둘러 나갑니다. 사장이 식탁을 정리하다 보니 노신사가 드신 우동그릇 안에 머리카락이 있는 게 아닌가요. 사장은 곧바로 골목으로 뛰어나가 노신사에게 용서를 구한다면서 머리를 숙인 채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물끄러미 사장을 바라보던 노신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됐습니다. 이제 머리를 드세요."

"아닙니다. 용서를 해주신 뒤에야 머리를 들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이 집 우동 맛이 좋다는 소문을 들어서 왔습니다. 가능하다면 환불 대신에 우동을 새로 말아 주실래요?"

사장은 다시 우동을 말아 노신사에게 대접했습니다. 노신사는 식사를 하면서 사장의 꿈이 무엇인지를 묻자, ‘일본에서 가장 맛있는 우동을 만드는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참 놀랍죠? 돈을 많이 벌겠다는 것이 아니라 가장 맛있는 우동을 만들어 제공하겠다는 것이 말입니다. 노신사도 감동을 받았습니다. 훗날 큰 회사를 경영하는 이 노신사는 그 사장을 자기 회사의 우동사업부 본점의 경영을 맡겼습니다. 우동 집 사장의 겸손함이 행운을 불러들인 셈입니다.

미국의 제22대와 24대 대통령은 클리블랜드입니다. 그가 23대 대통령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한 뒤에 미련 없이 고향으로 내려가 낚시질을 하며 소일하고 있었습니다. 낚시터에 가면 늘 어린 소녀가 그곳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클리블랜드와 소녀는 이내 친구가 되었습니다. 낚시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느덧 서로는 서로를 기다리는 사이가 되었어요. 그런데 놀라운 점은 그렇게 매일 함께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그가 전직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클리블랜드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그렇게 4년이 흐른 후, 그는 다시 24대 대통령으로 당선돼 백악관으로 들어간 뒤에야 소녀는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만 보면 클리블랜드는 무척이나 겸손한 사람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면서, 십여 년 전에 ‘나, 누군지 몰라?’라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남으로부터 확인하려고 했던 전직 장관의 모습, 그리고 전직 대통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낚시터에서 만나 기꺼이 친구가 되어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클리블랜드 대통령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누가 과연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요?

오사카 우동집 사장이 손님을 ‘왕’처럼 여기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우동을 대접하고자 하는 태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왕이 되는 방법은 지극히 간단하지 않을까요. ‘너를 왕으로 대우하면 바로 내가 왕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일 겁니다. 이때 ‘나’와 ‘너’, 모두가 ‘왕’이 되어 살 수 있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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