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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장
붉은 닭의 해. 새해 아침 우리 모두가 탄핵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주권자인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최순실이라는 강남아줌마에게 농단케 했으니 거의 내란죄에 해당하겠으나 어쨌든 그의 국민에 대한 배신으로 우리는 다시 새로운 희망의 나라를 꿈꿀 수 있는 소중한 계기를 갖게 됐기 때문이었다. 물론 희망의 새나라는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가 청와대를 떠나고 최순실이 감방에 갇히고 수많은 부역자들이 사법 조치된다고 하면 세상은 조금 숨통이 트이겠으나 촛불 민심이 밝혀놓은 새 나라의 기대는 아직 멀다.

 우선 개헌을 주장하는 일부 정치세력들의 행태를 보면 분명해진다. 국회의원의 수많은 기득권이 전혀 개혁되지 않은 채 시도되는 내각제(분권형 대통령제 포함)는 반(反)역사적이고 퇴행적이다. 절박한 서민의 삶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리그에서 권력게임을 즐기려는 음흉한 속셈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개헌론자들은 1987년 체제 종식을 주장하는데 사실 87년에 성립된 정치질서는 실질적으로 한국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학자들이 다수다. 국회 선진화법이 여당의 일방적 독주를 무력화시켰고, 국회의 인사청문회 제도는 때로 오남용되고 있다는 비판도 받긴 하지만 대통령의 제왕적 인사 권력을 적잖게 제한하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도 있다. 내각제의 본산인 영국에서 1979년부터 10여 년간 영국의 신보수회를 이끌었던 여성 총리 대처는 제왕적 총리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내각제를 해야 제왕적 대통령제의 권력 집중을 방지하고 권력 분산에 유리하다는 주장자는 한마디로 정직하지 못한 정치인의 전형일 뿐이다.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부역자들 말고도 우리 주변에서 재벌, 관료, 법조인, 교수, 의사, 정부 산하단체 고위직 등등 손가락으로 꼽기 어려울 만큼 숱하게 많은 ‘그들의 닮은 꼴’을 만난다. 삶의 현장 곳곳을 바꿔내는 전반적인 사회변혁을 이야기하지 않고 누가 대통령이 되고 총리가 되는지, 어떤 정파가 누구와 손잡고 정치세력화 하는지에 몰두하는 그들 정치인들 역시 정직하지 못한 부류들일 뿐이다. 이번 ‘박·최 게이트’의 핵심은 우리 사회의 상층 지배세력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챙겼고, 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았다는 걸 가감 없이 보여줬다. 정치권력-재벌-관료 지배연합이 예전에 잠시 고도성장을 주도한 것으로 평가받았으나 지금은 부패에 찌들고 소신과 영혼조차 없는 우리 사회의 발전에 걸림돌이라는 여론이 넘쳐난다. 이런 것을 고치기에 앞서 무엇을 고치겠다는 말인가!

 새 대통령을 뽑는 새해를 맞아 개헌이라는 정치적 구호보다는 개혁의 핵심인 경제민주화가 화두로 떠올라야 한다. 재벌에 과도하게 집중된 경제력을 분산시키고, 과실이 골고루 퍼지도록 균형 잡힌 경제를 만들어야 대한민국의 번영, 국민의 행복이 이뤄진다는 걸 부정할 수 있을까. 흔히 미국이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임에도 역동성을 잃지 않는 데는 20세기 초중반 독과점체제와 세습경영체제를 종식시킨 게 힘이 됐다고들 한다. 당연한 얘기다. 창의적 아이디어만 있으면 신생기업이 얼마든지 대기업을 누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못한 사회에서 미래의 희망이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분배강화도 그렇다. 우리의 저출산과 저조한 일자리 창출도 부실한 분배 정책과 깊게 연관돼 있다. 아이를 낳아도 제대로 키우기 어렵고 창업을 하려해도 패자부활전이 어려운 현실에서 이 땅의 젊은이들이 위축되는 건 너무나 당연한 현상 아닌가. 선거철만 되면 경제민주화를 외치다가 선거가 끝나면 재벌들 품에 안기는 반(反)민족적 정상배들의 역사는 이제 끝장을 내야 하는 것이 이번 ‘박·최 게이트’의 결산이기도 하다. 이번마저 실패한다면, 또 그런 일이 반복된다면 정말로 이 나라는 헬조선이 되고 만다. 잠룡을 꿈꾸는 정치인이 아닐지라도 모든 정치인들은 우리 사회의 ‘갑질’하는 풍토를 막고 갈수록 많은 젊은이들을 ‘흙수저 한탄자’로 만드는 불평등 구조부터 바꾸는데 전력을 쏟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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