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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구인 용인시 처인구 공원환경과장
오늘 아침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호주에 있는 딸아이와 대화를 했다. "호주는 지금 초겨울인가? 고국은 비가 안 와 모두 지쳐 있다. 오빠가 있는 카메룬은 3일마다 퍼붓는다는데…."

 예전엔 지리한 장마라 했는데, 이제는 징글징글한 가뭄을 한(恨)하는 메시지였다. 올 초 두 남매가 외국으로 떠났다. 큰아이는 2월에 졸업하자마자 아프리카로 취업해 떠났고, 대학 4년생인 둘째 아이는 어학연수차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둘 다 수만 리 이역으로 보내면서 걱정이 앞서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안정된 생활을 하는 모양새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세상과 SNS로 하나 된 세계를 매시간 절실히 느끼며 사는 나를 보면서 괜스레 예전의 편지나 펜팔에 대한 정겨운 추억이 잠시 시간을 멈추게 한다. 지금이야 호주나, 전기도 없어 자체 발전으로 생활하는 아프리카 오지와도 SNS를 통해 즉필담(卽筆談)을 하는 시절이라 말 그대로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실감한다. 그러다가도 번거롭기는 했지만 문득 예전의 정성스레 쓰던 손 편지 매력이나 낭만이 사라진 느낌에 좀 허전하다.

 문득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지난날 편지에 대한 추억 몇 편을 더듬어 본다. 처음으로 썼던 편지의 기억은 그림엽서였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60년대 말)이었다. 당시 목수로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사(校舍) 건축일을 하시던 선친을 따라 생전 처음 촌뜨기의 서울나들이가 있었다. 보이는 모든 것이 신기했고, 특히 지금은 창경궁으로 복원된 그 동물원에서 처음으로 봤던 호랑이나 기린 등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곳에서 그림엽서를 사서 작년에 고인이 되신 담임선생님께 서울구경 자랑의 글을 삐뚤빼뚤 써서 추억의 빨간 우체통에 넣었던 기억이 새롭다. 다음은 이모부님께서 월남전에 참전 중이셨던 시절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연말에 제 딴에는 국군아저씨께 쓰는 위문편지라고 거창하게 이모부님께 안부편지를 썼다. 그 당시 상투적으로 쓰이던 인사말을 빌려, "엄동설한 추위에 얼마나 고생 많으십니까?…"라고 썼던 기억이 새롭다. 나중에 답장이 왔는데 내용이 잘못됐다는 말은 없었고, 삿갓 모자를 쓴 베트공들과 싸우는 그림엽서 두 장을 부쳐왔었다.

 수년이 흐른 뒤에야 연중 더운 나라에서 ‘엄동설한’이란 편지글을 보고 한참 재미있으셨다고 했다. 병영(兵營)에서 부모님께 올렸던 편지는 지금 읽어봐도 생생한 현장감을 느낀다. 그 마음으로 효도한다면 세상에 효자 아닌 자식이 없을 것이다. 그 시절 한껏 그리워하던 고향 집에 첫 휴가 갔을 때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아주시던 어머님의 품이 그립고 연로하신 어머님께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이 절로 든다. 유행가 가사만 제대로 적어 봐도 감정이 북받치던 연애편지의 기억은 또 얼마나 그리운 일이었던가. 수동식 전화기도 보급이 제대로 안됐던 그 시절 설렘과 기다림의 연속인 연애감정의 매개체가 오로지 연애편지였던 것을 스마트폰에 중독되다시피 한 오늘날 청소년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군대 시절 네덜란드의 헬렌이라는 소녀와 해외펜팔을 하던 추억이 아련하다. 당초 목적은 그 당시 영작실력 향상이었지만 미지의 세계로의 도전정신도 있었던 듯하다. 학생잡지 뒷면 펜팔친구 주소록을 보고 성문종합영어의 영한작문 문장을 짜깁기해 몇날 며칠을 써서는 보내고 보름에서 한 달이나 걸리는 답장을 기다리던 그 설렘은 그 당시 삶의 행복 내지는 스릴이었다. 1년여 지속하다가 어떤 연유로 중단됐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지금쯤 중후한 금발 중년여인으로 살고 있으리라. 지금 생각하니 그 당시에는 영작을 대필해주는 직업까지 있었다. 순식간에 의사소통하는 요즈음,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도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스마트폰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요즈음에는 느껴보기 힘든 펜팔과 편지의 맛을 되씹었다. 딸아이에게 문자 한 통 보냈을 뿐인데, 이면에 이리도 많은 사연이 도사릴 줄은 나도 몰랐다. 제발 빗님께서도 이렇게 사연을 담아 추적추적 내려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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