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건 민족교육·무장투쟁 앞장… 암운의 시대 희망을 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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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건 민족교육·무장투쟁 앞장… 암운의 시대 희망을 쏘다
1. 수원의 독립운동 불씨 지핀 ‘필동 임면수’ 선생
  • 박종대 기자
  • 승인 2019.03.05
  • 1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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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 일제가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빼앗은 한일병합조약을 체결·공포했다. 그로부터 36년간 우리나라는 주권을 빼앗긴 민족으로서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는 설움을 겪게 된다.

 경기도는 전국에서 가장 치열하게 항일운동이 펼쳐진 지역이었다. 식민지 전락 이전에는 의병전쟁, 식민지 이후에는 국내외 전략거점으로 펼쳐졌다. 전 지방에 걸쳐 의병이 봉기했으며, 조선총독부 공략을 향해 의병전쟁을 벌였다.

 3·1운동 당시에도 모든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이뤄졌다. 전국적으로 약 200만 명이 참가했는데, 경기도가 가장 많은 만세운동 횟수와 시위 인원이 참여한 것으로 파악된다.

 서울에서 가까운 영향으로 청년운동과 소년운동도 활발히 이뤄졌다. 도내 청년·소년운동의 영향으로 농민운동, 학생운동, 여성운동도 활발히 전개됐다.

 본보는 한국 민족운동을 집약하고 있는 경기도 독립운동의 역사와 그 발자취를 재조명하고자 일제에 맞서 목숨을 바쳐 희생한 애국지사를 되새겨 보고 그들이 치열하게 싸운 항일유적지를 찾아가 본다. <편집자 주>

▲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필동 임면수 선생의 고향인 수원에서 열린 그의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시민들이 만세를 외치고 있다. <수원시 제공>
# 삼일학교 설립으로 항일운동 불씨 지피다

 임면수(1874∼1930)선생은 수원지역의 대표적 근대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다. 본관은 나주, 호는 필동(必東)이다. 1874년 6월 수원군 수원면 매향리에서 임집엽과 송씨 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났다. 19세에 아내 전현석과 결혼했다.

 임면수는 상동청년학원에서 민족교육을 받고 수원에 남아 구국운동에 참여하다가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상동청년학원은 1905년 상동교회가 설립·운영한 중등부 과정의 교육기관이다.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는 초등교육기관인 공옥여학교와 공옥남학교 외에 중등부 과정의 청년학원을 설립했다. 전 목사는 이 청년학원을 통해 구국운동에 헌신할 인재를 양성하고 투철한 민족정신을 키워 주기 위해 신앙교육과 함께 다양한 교육을 실시했다.

 1907년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상동청년학원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한 임면수는 이하영, 김태제 등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국채보상 취지서 수백 장을 발간해 수원을 비롯한 도내 각 군에 배포했다.

▲ 1960년대 세류동에 조성돼 있던 임면수 선생 묘역.
 국채보상운동은 수원 주민들에게 파장을 일으키면서 2∼3일 만에 의연금(자선이나 공익을 위해 모으는 기부금) 수백 원이 모금될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다. 이는 근대교육의 필요성과 자립경제 수립을 위한 경각심을 주민들에게 일깨워 주면서 1907년 8월 초까지 계속 모금운동이 진행되는 등 국채보상운동 확산과 분위기를 만들어 줬다.

 1902년 임면수는 젊은 동지들과 함께 삼일학교를 설립했다. 이는 수원지역의 대표적 근대학교로 발돋움했다. 1906년 삼일학교가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는 동지들과 함께 10원을 지원했다.

 삼일학교에서 임면수는 수업을 담당하다가 나중에 학교교육과정이 확장되면서 교감직까지 맡게 됐다. 당시 교장은 보통 명예교장 형태였기 때문에 사실상 실무자는 교감이었다. 그는 여성교육 발전을 위해 집터와 토지, 과수원을 현재 매향정보중고등학교 부지로 기부하기도 했다.

 1909년 임면수는 삼일학교 교장에 오르면서 관내 사립학교 설립운동을 주도하거나 후원하는 등 교육가로서 면모를 보였다.

 삼일학교는 교과과정을 정비하면서 교육내실화를 꾀했다. 군사훈련에 버금가는 병식체조와 행군은 학생들에게 상무정신을 고취시켰다. 담당교사는 구한국군 출신인 강건식에 이어 송세호가 맡았다.

 1910년 임면수는 일본에 의해 조선이 강점됐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가 비밀리에 신민회에 가입했다. 신민회 결정과 지시에 따라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서다.

▲ 現 임면수 선생 묘비.
# 만주에서의 치열한 항일운동

 임면수는 1912년 부인과 자녀 2남2녀를 데리고 극비리에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한때 만주 상황이 힘들어졌던 시기에는 신흥무관학교 유지비를 마련하기 위해 군사훈련비를 조달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만주 한인사회는 한인사회의 자치와 산업 향상을 지도할 새로운 조직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독립운동가들이 ‘부민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부민단은 부여의 옛 영토에 부여의 후손들이 부흥결사를 세운다는 뜻이었다.

 임면수도 부민단원으로 활동했다. 역사적 기록으로 짐작해 보면 임면수는 독립운동가로서 객주업에 종사한 것으로 파악된다. 부민단은 200명으로 결성된 결사대를 편성, 만주 통화현에 일본영사관 분관 설치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의 부인인 전현석은 수시로 찾아오는 독립운동단체의 식사를 위해 하루에도 수차례 상을 차려 주고 짐보따리와 총기를 맡아 주는 일을 했다. 임면수의 장남인 임우상도 20대 나이로 아버지를 도와 신흥무관학교 운영을 위한 군자금 마련을 위해 노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면수는 1910년 만주에 설립된 민족학교인 양성중학교에서 교장으로 활동했다. 양성중에서는 학생들에게 국어문전, 대한신지지, 대한국사, 유년필독 등을 통해 한글, 한국사, 한국지리 등을 가르쳐 민족의식 고취에 기여하려고 했다.

 임면수는 1919년 만주 통화현에서 집안현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일본 순사와 친일조직인 조인인조합 총지부를 비롯해 국경 헌병들을 습격하려고 했다. 1920년에는 일본 경찰관 및 그 일대에 거주하는 친일 조선인을 암살했다.

 그는 남만주 일대(다롄∼창춘)에서 일제가 군수물자와 병력 수송 등을 위해 경영하던 철도 부근에 거주하는 동지와 기맥을 통해 아편 밀수입 이익을 상하이임시정부에 송금하려는 혐의로 체포돼 조선으로 추방당했다.

▲ 필동 임면수 선생 사진(왼쪽)과 부인 전현석 여사. 그는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렸다.<수원박물관 제공>
 일제에 체포된 임면수는 함남 안변군과 강원 회양군의 경계에 있는 고개인 철령으로 압송돼 가던 중 중국인 여관에 머물다 한국인 경찰 유태철의 도움을 받아 탈출에 성공한다. 그는 낮에 숨고 밤에 이동하면서 14일 만에 중국 지린성 한인 농촌마을에 도착, 이곳에서 은둔생활을 보낸다. 이후 창춘을 거쳐 지린성 부여현에 도착해 겨울을 지낸다.

 하지만 1921년 지린에서 잠입활동을 벌이다 밀정의 고발로 지린영사관에 체포된 후 평양감옥에 압송된다. 이곳에서 임면수는 고문과 매로 전신마비가 되는 고난을 당하고 간신히 고향으로 돌아오게 됐다.

 고향에서 임면수는 경제적으로 파산해 병마에 시달리면서 생계 유지조차 힘들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도 1922년 수원소작인상조회에 이사로 참여하고 1923년 민립대학 설립발기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임면수는 같은 해 삼일학교 건축물인 아담스기념관을 건립하는 감독으로 임명됐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930년 56세 나이로 순국한다.

박종대 기자 pjd@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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