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들풀처럼 일어난 의병, 궁성 탈환 핵심기지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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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들풀처럼 일어난 의병, 궁성 탈환 핵심기지로 삼다
9.남한산성 저항의 역사 [2] 연합의병 투쟁과 일제의 진압
  • 정진욱 기자
  • 승인 2019.06.04
  • 1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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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6년 5월 김하락이 이끄는 의병이 주둔 했던 의흥관아 터. <사진=독립기념관>
# 경기의병의 거점 남한산성

 1896년 경기지역 항일의병들의 투쟁 거점은 남한산성이었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그해 11월 발표된 단발령에 반발한 이천과 여주·광주·용인·양평 등 경기지역 의병들은 서울에서 가장 근접한 남한산성에 운집해 일제로부터 궁성을 탈환하고자 했다.

 이천수창의소는 서울에 있던 유생들인 김하락·조성학·구연영·김태원·신용희 등이 이천에 모여 단발령이 공포된 다음 날인 1895년 12월 31일 의진을 구성했다. 김하락 의진이 900명 넘는 군사를 모집하자 용인·안성·포천·시흥·수원·안산 등 인근 지역의 민중들이 호응해 이천에 몰려들었다.

 중간 지도부 역시 이천·여주·광주 등 경기 각 지역에서 활약하던 대표자들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

 김하락의 「진중일기」에 따르면 1천여 명에 이르는 관포수가 의진에 참여했다.

 1896년 1월 17일 광주군 백현에서 이천수창의소는 서울 용산에서 파견된 일본군 수비대 180여 명과의 전투 끝에 승리해 많은 전리품을 노획했다. 이어 2월 12일 이현에서 재차 투입된 일본군 200여 명과 전투를 벌인 후 이천으로 재집결했다. 여주의 군사 500여 명을 모집해 2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2월 28일 남한산성으로 진입했다.

 남한산성에는 이미 광주의진이 진을 치고 있었고, 양근의병도 합세해 있었다.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보도한 일본의 ‘동경조일신문’에 따르면 남한산성 내 의병 수는 약 1천600명에 이르렀고 이 중 600명이 광주의 농민이었다고 한다.

 산성에는 군수물자도 풍부해 군량과 무기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 비축한 군량미는 5만~8만여 석에 달할 정도였다. 무기로는 천자포와 지학포 등 대포류와 천보총 수백 자루, 조총도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으며, 탄약 철환도 산더미 같았다고 한다.

 친일정부는 곧 친위대와 강화병을 합쳐 3개 중대와 2개 소대를 파견해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정부군은 남문 밖에 지휘소를 설치해 1개 중대를 배치하고 동문 밖 불당곡과 향교리에 각 1개 중대, 서문 밖 석회당과 동문 쪽 암현리에 각 1개 소대를 분산 배치해 보급로를 차단하며 공격 태세를 갖췄다.

 관군은 3월 5일 공격을 벌였으나 오히려 크게 패해 대포 1문까지 빼앗긴 채 쫓겨나고 말았다. 관군은 다수의 일본군과 함께 재공격했으나 험난한 지형을 이용한 의병의 공격으로 수차례 패전을 거듭했다.

 남한산성 연합의진은 마침내 서울진공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이 계획은 의병들이 지리적으로 서울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으며 다수의 병력과 무기들, 수차례에 걸친 전투 경력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의진의 서울진공작전은 러시아공사관에 있는 고종의 환궁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3차에 걸친 계획을 세웠는데, 1차로 산성 근방의 의병들이 연락해 수원을 점령하고, 2차로 협공으로 산성 주변 일본군을 타파하고, 3차로 충청·전라·경상도 지방 의병까지 규합해 경성을 진공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진공계획은 1896년 3월 22일 갑자기 붕괴하고 말았다. 관군의 꼬임에 빠진 의병부대 지휘관이 성문을 열어줘 관군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날 새벽 2시, 일본군과 관군의 남한산성 침공이 시작됐고 전투는 날이 밝을 때까지 치열하게 전개됐다. 당시의 전투로 사망자가 의병 500여 명, 관군 300명이었다고 하며, 성을 빠져나간 의병은 4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남한산성에서 쫓긴 의병들은 대부분 스스로 해산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천으로 모여든 의병들이 4월 7일께 김하락 등과 함께 재기할 것을 결의했으나 일제와 관군의 추격이 집요해 양평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결국 김하락 의병장은 나머지 의병 100여 명을 인솔해 영남지방으로 남하해 끝까지 일제에 항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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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경기도사이버도서관
# 일제의 남한산성 파괴

 일제는 또다시 산성이 의병들의 항전지로 전락되는 것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일본군은 1899년 12월 초 수비대 4중대가 산성에 숙영하며 지형을 파악한 데 이어 관내의 모든 병기와 탄약을 회수했다. 그리고 산성마을 안에 광주헌병분견소를 설치했다.

 당시 경기도 일대는 1907년 7월 일본 본토에서 파견된 일본군 보병 제12여단(제47연대와 제14연대)이 맡아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산하의 제14연대는 주로 구 한국군 진압을 목적으로 편성됐는데, 제1대대는 용산에 대대본부를 두고 개성과 인천·수원·영등포에 중대병력을 배치했다.

 제1대대는 7월 27일부터 수원수비대를 양평·용인·광주 등지에 정찰병으로 파견하고, 8월 23일 광주 곤지암 동쪽의 망월영에서 50~60여 명의 의병과 교전을 벌여 의병 2명을 사살했다. 다음 날인 24일에는 제3중대 능촌중대가 이천 출신 의병장으로 남한산성연합의진에도 참여한 바 있는 구연영 부자를 체포해 사살했다.

 1907년 8월 남한산성에 파견된 부대도 제14연대 제1대대 소속 병력일 것으로 여겨진다. 이 부대는 8월 22일 기병대를 광주군에 파견해 무기 전부를 압수하고 탄약을 보관하는 화약고와 무기고를 폭파했다.

 파괴는 산성 안의 사찰들을 주요 대상으로 삼아 진행됐다. 사찰이 의병들의 무기와 군수물자 보급처인 동시에 초모활동을 벌이는 근거지가 되기 때문이었다. 9개 사찰 중 8개 사찰이 전소됐고, 산성 동문 쪽의 장경사만 겨우 소실을 면했다.

 일제는 아예 산성마을 자체를 해체시키려 노력했다. 1912년부터 2년간 서울에서 광주군 주막리(오늘의 경안동)를 지나 이천에 이르는 신작로를 개설해 행정조직 개편을 유도했다. 이후 1914년 3월 취해진 행정구역 통폐합 조치를 통해 남한산성을 광주부가 아닌 광주군 중부면에 편입해 위상을 격하시켜 버렸다. 파괴된 행궁 터에는 중부면사무소가 설치됐다.

 나아가 일제는 교통이 불편하다는 이유를 들어 광주군청을 임의로 옮겨 버렸다. 아울러 경찰서 등 치안기관과 광주우체국 등 관공서 기관도 함께 옮겨 버렸다. 이러한 일방적인 조치로 인해 군청사를 비롯한 행정기구와 치안, 통신 및 체신기관 등이 모두 산성마을을 떠나야 했다.

 이로 인해 조선 초기부터 약 300년간 행정과 군사도시로서 기능했던 남한산성 마을은 중심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궁벽한 산골마을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1871년 편찬된 「광주부지」에 기록된 산성 내의 호구 수는 1천161호였는데 1907년 조사에 따르면 성내동의 전체 호구는 844호, 3천382명으로 감소했다. 1930년대 중반의 보고에는 더욱 급감해 산성리에 241가구, 1천402명으로 조사됐다. 1940년대 중반 무렵에는 70~80호만 남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진욱 기자 panic82@kihoilbo.co.kr

※본 내용은 김명섭 위례역사문화연구소 연구실장(문학박사·남사모 사무국장)이 작성한 ‘일제의 남한산성 침탈과 주민들의 저항 사례연구’ 글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으로 일반 학계의 주장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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