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전에 바다 메워 일군 터전 이곳에 쌓인 ‘시간의 더께’ 벗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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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전에 바다 메워 일군 터전 이곳에 쌓인 ‘시간의 더께’ 벗긴다
인천 서구 상생마을, 작지만 큰 변화의 시작
  • 한동식 기자
  • 승인 2019.07.15
  • 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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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곳을 ‘개 건너’라고 했다. 1961년 도화동과 가좌동의 너른 갯벌 위에 인천교가 놓이기 전까지 말이다. 과거 서구에는 크고 작은 섬이 여럿 있었다.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육지화되면서 사라진 많은 섬들 중에는 지금도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친구들이 있다. 대표적인 섬이 경제자유구역인 청라국제도시의 어원이 된 청라도(靑蘿島)다. 그리고 서구 주민들에게 여전히 친근하게 불리는 율도(栗島)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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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시 서구 석남동 상생마을 도시재생사업지 일원 골목 전경.
 섬 모양이 밤톨 같이 생겼다고, 또는 밤나무가 많다고 해서 율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과거 문헌에 율도라는 이름이 종종 등장하는데, 임진왜란 때 700의병을 이끌고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중봉 조헌 선생의 일화가 대표적이다. 율도 개척의 선구자로 꼽히는 중봉 선생은 임진란이 일어나기 전 모두가 무사태평일 때 이를 예견하고 인천 앞바다의 율도를 개척해 가족들의 피난처로 삼았다. 논밭을 일구고 집을 지을 때는 찹쌀로 떡을 만들어 그것으로 벽을 치게 했다. 난리 중 양식이 떨어지면 그것으로 대신하려고 했다 한다. 현재 동구와 서구를 잇는 중봉대로는 조헌의 호(號)가 붙었다.

# 중화학 중심이 된 섬마을

 1986년 이 일대에서 진행된 간척사업으로 섬이 육지화되기까지 율도에는 폭약창고와 정유공장, 화력발전소 등이 건설되면서 1960년대 말 인천 중화학 산업의 심장이 된다. 1900년 미국인 사업가 타운젠드가 폭약창고를 짓기도 했으나 곧 문을 닫고 그 자리에 대규모 정유공장과 화력발전소가 자리잡는다.

 정유공장은 SK인천석유화학㈜의 전신인 경인에너지개발㈜이 1969년 설립했다. 경인에너지개발은 한국화약과 유니언오일(Union Oil)의 합작투자로 만들어진 회사로, 이후 수차례 주인이 바뀌면서 경인에너지, 한화에너지, 인천정유, SK인천정유, SK에너지인천컴플렉스 등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지금의 SK인천석유화학㈜으로 출범한다.

 이곳에는 정유회사뿐 아니라 화력발전소도 있었다. 1997년 폐지되기 전까지 국내 유일의 민간전력회사 소유의 화력발전소였다. 16만2천400㎾급의 중유전소 기력발전설비(汽力發電設備) 2기로 한국화약㈜과 유니온오일이 공동 출자해 1972년부터 연간 약 20억㎾/h의 전력을 생산하는 발전을 시작했다. 생산된 전력은 전력수급계약에 따라 한전에 판매돼 경인지구에 공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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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전벽해 율도

 이렇게 정유공장과 발전소가 들어서는 사이 율도는 서서히 육지화된다. 1960년대 중반부터 인천과 경기도 김포 사이에는 빈민구제사업의 일환으로 해안간척지 사업이 진행됐다. 1964년부터 경서동에서 시작해 장도를 거쳐 율도까지 7.3㎞의 둑을 조성하고 이 일대를 임해공업단지로 지정한다. 1980년대에 들어서 동아건설이 농지 조성을 목적으로 매립지를 확장하는 사업을 진행하면서 간척사업이 속도를 내기 시작해 1983년부터 기존 간척지를 포함해 원창동과 율도, 청라도 등의 간척이 마무리된다.

 이렇게 율도가 섬이 아닌 육지화됐지만 주민들의 생활환경은 열악했다. 당시 경인에너지 인근은 황량했다. 공장 너머 보이는 것이라고는 미나리꽝이나 논밭이 전부였다. 정유공장이 세워졌을 당시만 해도 별도의 파이프라인이 없어 정유차가 기름을 날랐다. 하지만 도로 포장이 제대로 안 돼 비가 오는 날이면 장화 없이 다닐 수 없었다. 주택도 초라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주거지가 형성됐지만 주택이라고는 공장에 근무하는 인부들이나 직원들이 거주하는 사택, 그리고 급조한 단독주택과 연립주택 등이 대부분이었고 나머지는 농민들의 농막이 전부였다. 이후 정유공장 인근에 목재단지와 크고 작은 공장이 들어서면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정유공장이 들어선 지 올해로 꼭 50년째다. 그 사이 정유공장 앞 석남동은 사람들이 모이고 아파트와 단독주택들이 꼬챙이 하나 꽂을 곳 없이 빽빽이 자리잡으며 과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됐다.

# 활력 잃은 도시에 희망을

 그러나 주거환경은 더 열악해져 젊은이들이 하나둘씩 떠나며 마을은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주민들은 떠나는 이웃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며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겠다고 마을재생에 동분서주다. 이웃들이 다시 찾는 동네, 다시 활기 넘치는 동네로 만들기 위해 주민들은 도시재생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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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시 서구 석남동 상생마을 도시재생사업지 일원 골목 전경.
 40년 전인 1979년 이곳에 정착한 장장순(72)할머니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서울에서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정유공장과 미나리꽝, 논밭이 전부였지. 도로라고 해 봐야 온통 흙길이어서 진짜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나왔던 곳이 여기야. 율도 버스 종점도 온통 흙길이었고, 건물이라고 해 봐야 연립과 단독 몇 채 정도였고 대부분이 미나리꽝이나 논밭이었어. 저기 신석초등학교와 신광아파트도 예전에는 미나리꽝이었고 그 옆은 논밭이었어. 지금은 옛날 모습을 찾기 어렵지만 그래도 그때는 살기 힘들었어도 공기는 좋았는데 이제는 집들도 낡고 공기도 나빠져서 더 살기 어려워."

 40살 때 이곳에 정착해 34년째 살고 있는 김영애(74)할머니는 예전처럼 정을 나누는 마을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1985년 이곳에 정착했을 때만 해도 여름에 문을 열면 반딧불이가 집안으로 들어왔고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잠을 청했었지. 그리고 사람들도 얼마나 정이 많고 다정했는지 살기 좋았는데, 이제 가게들은 장사도 안 되고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면서 빈집도 늘어나 안타깝지. 지금 상생마을이라고 도시재생사업을 하는 것 같은데 하루빨리 예전처럼 살기 좋은 마을이 됐으면 좋겠어. 우리가 뭐 바람이 있나. 서로 오순도순 이웃들과 정을 나누며 살면 그게 잘 사는 마을이지."

한동식 기자 dshan@kihoilbo.co.kr

사진=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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