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신 농협대학교 부총장
이선신 농협대학교 부총장

요즘엔 거의 통용되지 않지만 과거에는 ‘주사입법’이란 말이 있었다. 법을 6급  일반직 공무원인 ‘주사들’이 만든다는 말이다. 우리 헌법은 법안 발의권을 국회의원뿐 아니라 정부에게도 부여하고 있다. 민주국가에서 입법은 국민의 대표자에 의해 이뤄져야 하므로 ‘의원입법 방식’이 원칙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에서 전문적 내용의 입법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정부에게도 법안발의권을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측면에서 ‘정부입법 방식’을 허용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입법의 실제는 ‘정부입법 방식’이 활용되는 경우가 대단히 많은데, 그 법안 내용을 행정 실무자인 ‘주사들’이 작성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법을 국회의원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주사들이 만든다는 뜻으로 ‘주사입법’이란 말이 생겨났던 것이다. 행정부 주사들이 만든 어설픈 법을 합리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법원에서 판사들이 재판을 할 때 진땀을 뺀다는 우스갯말도 있었다.

 입법이 이뤄지려면 많은 절차를 거치게 된다. 정부입법 방식의 경우 관련 부처 협의, 입법예고, 부처 내 결재, 규제개혁 심사위원회 심사, 법제처 심사 등을 거쳐 국무회의에서 의결되면 정부에서 법안을 국회에 보낸다. 국회에서는 소관 상임위원회 의결(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사전에 심의한다), 법제사법위원회 의결, 본회의 의결을 한 후 의결된 법안을 다시 정부에 보내면 정부에서는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대통령이 공포해 시행하게 된다(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이처럼 여러 차례 회의와 많은 사람의 검토를 거치게 되지만 법안에 포함된 문제점이 면밀히 걸러지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야당이나 언론에서 문제를 삼는 경우에는 법안을 꼼꼼히 살펴보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경우에는 법안들이 허술하게 심의돼 일사천리로 회의를 통과함으로써 부실하거나 오류를 포함한 내용으로 입법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법이란 일단 만들어지면 비록 시행 과정에서 문제점이 드러나더라도 이를 다시 고치기는 매우 어렵다. 많은 사람이 잘못된 법에 의해 피해와 고통을 당한 후에 그 개정 필요성이 사회적으로 크게 부각되고 언론에서 떠들썩하게 문제 삼아 여론이 비등해야 비로소 국회와 정부가 법 개정을 검토하게 된다. 심지어는 사회적 물의가 크게 발생한 후에도 법 개정에 관한 논의만 무성하게 이뤄지다가 시간이 흐른 뒤에는 용두사미격으로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법 개정에 이르지 못하고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기도 한다. 요컨대 법은 처음 만들 때 잘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다수의 입법이 정부입법 방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법안을 작성하는 일을 맡는 행정부 공무원 중에 법률전문가가 많아야 한다. 법률지식이 빈약한 행정부 공무원이 법안을 기초하게 되면 국민의 권익을 침해할 수 있어 매우 위험하다. 

 행정부 공무원 중에 법률전문가가 많아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행정 즉 법의 집행을 담당하는 행정공무원이 법률지식이 빈약한 경우에는 불합리한 법 해석과 적용으로 자칫 위법한 행정행위를 저지르게 될 수 있고 이로 인해 행정소송이 제기되면 시간과 비용 소모 등 막대한 행정력을 낭비하게 되기 때문이다. 

 요즘 행정부에서도 필요한 경우 부처별로 변호사 등 법률전문가를 공무원으로 특별 채용하기도 한다. 지난 4월 12일 일본과 후쿠시마 수산물 분쟁에서 세계무역기구(WTO) 상소심 승소의 쾌거를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정하늘(39) 산업부 통상분쟁대응과장도 미국 통상전문 변호사 출신으로 대형 로펌에 근무하다가 공모를 통해 공무원으로 임용된 경력을 갖고 있다. 국가의 대외적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도 행정부 공무원 중에 법률전문가가 많아야 하는 것이다. 생각건대, 최근 로스쿨을 통해 대량 배출되는 변호사들 중에서 외국어 능력 평가 등 소정의 절차를 거쳐 5급 행정공무원을 다수 채용하는 것이 국가 발전을 도모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또한 ‘법치행정주의’ 기틀을 더욱 탄탄하게 다짐으로써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질적 발전을 통해 국리민복을 강화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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