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겨레문화연구소 이사장
이재훈 겨레문화연구소 이사장

지난 10월 9일은 ‘제573돌 한글날’이었다. 언론 보도를 보면 서울을 비롯해 전국 각지와 해외에서까지 다채로운 한글날 행사가 열렸다고 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글, 세상을 열다’를 주제로 한글날 전야제와 전시, 공연, 체험, 학술대회 등을 다양하게 개최했다.

각 시도에서도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는 다채로운 문화제를 열었고, 전국의 국어문화원과 재외 한국문화원, 그리고 해외 세종학당 여러 곳에서도 우리말 겨루기, 손글씨 쓰기, 태극기 그리기 등 다양한 기념행사가 있었다는 소식이다. 

매년 한글날마다 반짝 열리는 연례행사라서 그런지 시민들의 관심은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사전 홍보가 충분치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관심 있게 살펴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단발성(單發性) 행사들이 대부분이었다. 

늘 사용하는 우리 말과 글일 뿐만 아니라 늘 있었던 행사라서 일반인들의 관심이 줄어든 탓일까?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거의 학생들이나 어린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낯설지 않은 이런 풍경이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우리 말과 글이 갈수록 품격을 잃어가고 있는 현상을 보여주는 쓸쓸한 한 단면이 아닐까?

아름답고 과학적인 우리 말과 글이 최근 들어 이상하게 변질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정도가 심화되고 있는 모습이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자기네 구성원들끼리만 주로 사용하는 은어(隱語)나 통속적으로 쓰는 저속한 말인 속어(俗語), 외국에서 들어온 말이지만 국어처럼 쓰는 외래어(外來語)는 차라리 나은 편이다. 

2000년대 초 인터넷 보급과 맞물려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신조어(新造語)의 유행은 우리 말과 글을 아예 난도질하듯 바꿔놓고 있다. 

지금은 이미 사회현상이 돼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신조어가 거의 일상 생활언어처럼 사용되고 있는 모습이다. 

예기(禮記)에서는 ‘지도자가 하는 말은 몸 밖으로 나오는 땀과 같아야 한다’며 말을 삼가고 삼갈 일이라고 했다. 

품위 없는 말을 일삼는 일부 정치인과 종교인, 점잖지 못한 말들을 경쟁하듯 마구 쏟아내는 종편 방송이나 팟 캐스트 출연자들의 책임은 그 누구보다 크다. 

게다가 마치 저주(咀呪)라도 하듯 험한 글들을 SNS를 통해 무차별 전파하는 사람들도 우리 말과 글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나아가 사회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이처럼 우리 말과 글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있는 부끄러운 모습들은 세계 석학이나 유명 작가들의 한글에 대한 찬사를 다시 떠올리며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동방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 사람들이 사용하는 한글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표현한 최초의 외국학자로 알려진 하버드대학 라이샤워(E.O. Reischauer)교수와 페어뱅크(J.K. Faurbank)교수. 그들은 저서에서 "한글은 아마도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모든 문자 중에서 가장 과학적인 체계일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대지」의 작가로 잘 알려진 펄 벅 여사는 "한글은 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배우기 쉬운 글자이며 가장 훌륭한 글자"라고 했고, 세종대왕을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도 말한 바도 있다.

프랑스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장 마리 르 클레지오도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의사소통에 편리한 문자"라는 찬사를 보냈다. 

영국의 언어학자인 샘슨(G.Sampson)교수 역시 "15세기에 세종대왕이 독창적이고 훌륭한 음성 표기의 글자체를 창조했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과학적인 문자체계이며, 세계 최상의 알파벳이다. 과학적으로 볼 때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글자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극찬했다. 

영국의 문화학자 존 맨은 그의 저서 「세상을 바꾼 문자, 알파벳」에서 "한글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라 격찬하기도 했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이란 말이 있다. 작고 날카로운 쇠붙이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뜻으로, 짧은 경구(警句)로도 사람을 크게 감동시킬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우리 조상들은 거듭되는 전란(戰亂)과 가난에도 품격 있는 해학을 즐길 줄 알았다. 많은 고전 작품들이 풍부한 해학으로 가득 차 있는 것만 보더라도 해학과 유머는 우리 말과 글의 품격을 유지해 온 귀한 전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과거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바람직한 사상이나 관습, 행동 등이 현재까지 전해진 것을 전통이라 하는데 우리 말과 글의 품격을 유지해 온 그 귀한 전통은 어떻게 살려가야 할까? 

‘일언부중(一言不中) 천어무용(千語無用)’ 한마디 말이 맞지 않으면 천 마디 말이 쓸데없다는 고사성어(故事成語)를 명심해야 할 일이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