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 제물포고 교감
전재학 제물포고 교감

우리는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過猶不及)’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이는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많은 분야에 걸쳐서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한다. 과거 우리네 삶이 너무 빈한해서 물리적, 정신적 공간을 구분하지 않고 비어 있는 것은 무엇이든 채우려는 욕망이 가득했다. 그 결과 우리는 5천 년의 가난을 극복하고 지금처럼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시대가 없었다. 정치적인 민주화 역시 마찬가지다. 기나긴 독재와의 투쟁에서 민주화를 최단기간 내에 이뤄낸 민족의 위대함은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쾌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교육에의 열망은 어떤가? 망아지는 제주도로, 자식은 서울로 보내 제대로 키워 보겠다는 바람은 채움에 대한 열정이었으며 이는 곧 엄청난 성과로 이어졌다. 그런데 지나침은 항상 탈이 나게 마련인가? 과유불급의 현상이 우리 사회 전 영역에 들불처럼 번지면서 자녀에 대한 투 머치 러브(Too Much Love)는 일종의 경각심마저 유발하고 있다. 자녀들에 대한 토털서비스는 결혼과 집 마련까지 한계가 없음으로써 노후를 보내는 부모들의 불우한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한다. 또한 자식 교육에 대한 지나친 사랑이 시대적인 기치로 내세운 ‘정의, 공정, 평등’에 대한 의식과 대항함으로써 부모의 탐욕에 제동이 걸리는 현실은 이제 우리 역사에 전화위복의 기회이기도 하다. ‘과유불급’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논어의 해석과 시중의 해석이다. 경전에 의하면 넘침과 모자람은 적당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와 달리 시중의 해석은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것이다. 후자는 생활의 경험에서 나온 평가다. 일례로 십리를 더 간 것이 덜 간 것보다 손해라는 뜻에서 못하다고 한 것이다. 십리를 덜 갔다면 십리만 더 걸으면 목적지에 도달하지만 목적지를 지나쳐 십리를 더 간 사람은 목적지까지 돌아오기 위해 도합 이십 리를 더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과유불급’은 투 머치 러브에 대한 시중의 해석, 생활 경험의 지혜를 따른다. 즉, 과한 행동은 모자라는 행동보다 나쁘다는 것이다. 모자라는 행동은 아쉬움을 남기지만 기회도 남긴다. 반면에 과한 행동은 마음에 상처를 입혀 기회를 잃을 뿐만 아니라 원한을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두 분야에서 지나친 과유불급 현상이 지배적이다. 우선 정치적으론 ‘인사가 만사’라 했지만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흠결 없는 인사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시시비비는 가려야 하고 정당한 비판은 수용해야 한다. 부풀린 의혹과 가짜뉴스가 진실에 앞서도 안 된다. 지금 우리는 이념과 사상에 의해 무조건적인 지지와 반대를 위한 반대가 난무한다. 과연 정치에 중용은 없는 것일까? 하지만 교육에의 지나친 과유불급 현상은 어찌할 것인가? 자식에 대한 지나친 사랑이 결국 자녀를 망치고 국민들 간에 위화감을 조성하며 특히 교육 사다리를 통한 계층 이동의 국민적 희망을 완전히 붕괴할 때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최근 사퇴한 한 법무부장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지나친 교육열은 부러움의 대상이기보다는 합법을 위장한 불공정에 관해 국민적 분노를 자아내고 일반 사람들 사이에선 소위 ‘못난 부모’를 만들어 내는 잣대가 되고 있다. 어느 부모인들 자식에 대한 사랑에 차이가 있을까마는 직위와 부를 이용한 편법적이고 불법적인 지나친 사랑은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 이는 필자가 스스로를 위로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자녀에 대한 지나친 사랑이 불러올 불행은 부모와 자녀에게 각각 절제와 자립심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교육적 성찰과 과제를 남긴다. 자녀 교육이란 명분으로 부모의 영향력을 내세운 지나친 사랑은 그것이 진정으로 자녀를 위하는 것일까? 지나치면 모자란 것보다 훨씬 못하고, 손해이고 피로하고 위험하며 남겨둬야 할 기회마저 잃고 남의 원한을 산다는 것을 자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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