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있는 그대로를 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실제 삶에서 적용하기에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해가 생기고 다툼이 일어나곤 하지요. 무엇 때문에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인터넷에 올라온 글 중에 우리가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오빠는 거의 매일 싸움을 하다시피 해서 혼나는 일이 흔했다. 성적도 늘 꼴등이다. 나는 매일 늦게 들어오는 오빠 때문에 엄마 아빠의 심부름꾼이 됐다. 오늘도 매일 누워 계시는 아빠의 약을 사러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가죽잠바를 입은 불량배가 나를 치고 가더니 갑자기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네가 날 아프게 했으니 치료비를 내 놓으라’고 했다. 나는 아빠 약값밖에 없었고, 그 돈을 주면 아빠는 약을 먹지 못해 힘든 날을 보내야 한다. 그 약값도 엄마께서 한 달을 일해야 간신히 벌수 있는 돈인데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였다. 오빠는 금세 상황파악을 하고는 불량배들과 싸웠다. 불량배들은 오빠의 얼굴을 보고 도망갔다. 나는 오빠의 얼굴을 보고 나를 구해주기 전에 이미 싸웠다는 것을 알았다. 오빠가 등에 업히라고 하더니 약을 사러 같이 가자고 했다. 

약을 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오빠 등에 업혀 ‘오빠는 꿈이 뭐냐?’고 물어보았다. 오빠는 유명한 권투선수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오빠는 여태까지 싸워서 그랬던 게 아니라 권투 연습을 해서 상처투성이였다는 사실을 말해줬다.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오빠가 매일 싸워서 정말 미웠는데, 오빠는 가난한 우리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열심히 권투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린 동생은 부모님으로부터 들은 말이 오빠의 행동을 판단하는 기준이 됐고, 그래서 오빠를 깡패라고 믿었던 겁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전혀 사실이 아니었죠.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오빠의 선택이었던 겁니다. 어쩌면 대부분의 오해는 이렇게 ‘나의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현자들의 철학우화」에 나오는 다음의 예화에서 이러한 왜곡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 계율 중에 돼지고기와 이교도 앞에서 붉은 포도주를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있다. 유대인 남자가 기차여행을 하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군인이 햄 샌드위치를 먹다가 혼자 먹기 미안한지 하나를 권했다. 유대인 남자가 사양하자, 이번에는 붉은 포도주를 꺼내 마시면서 말을 건넸다.

"이렇게 장시간 여행하는데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나요?" "성의는 고맙지만 저희 계율이 워낙 엄해서요." "그 계율을 절대 어겨서는 안 되는 겁니까?" "꼭 그렇진 않아요.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는 예외가 인정됩니다." 이때 군인은 권총을 들이대고 위협을 하며 이렇게 강요했다. "이 포도주를 마셔! 그렇지 않으면 방아쇠를 당길 테니까." 유대인 남자는 그제야 못이기는 척하며 받아마셨다. 그러자 군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제 장난이 너무 지나쳤지요? 죄송합니다." "천만에요. 그런데 기왕이면 아까 햄 샌드위치를 먹을 때 위협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유대인 남자의 마지막 말이 참 재미있지요? ‘계율’은 곧 삶의 ‘기준’입니다. 

사회가 어려워질수록 이런 적대적 관계가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상처만 안긴 채 살게 합니다. 왜냐하면 신념이 너무 강하면 귀도 눈도 멀게 만드니까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을 지도 모릅니다. 오빠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보는 어린 동생의 지혜가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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