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와 투자, 수출 등 수요측 물가상승 압력이 줄어, 근원물가 상승률이 0%대로 떨어졌다고 12일 한국은행이 밝혔다. 근원물가 상승률은 (유가나 농산물 등) 가격 등락이 심한 품목을 뺀 상품·서비스를 계산한 지표로, 그 나라의 기조적인 물가 흐름을 보여준다. 경제협력개발기구에 따르면 한국의 근원물가 상승률은 0.6%(10월 기준)로 미국(2.3%)과 영국(1.7%), 독일(1.6%) 등 선진국보다 낮았다. 나 홀로 경기불황의 그림자가 깊고 넓게 퍼져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더 큰 문제는 지금 겪는 경기침체가 근시일 내에 개선될 여지가 희박하다는 점이다. 저성장 지속, 제조업 악화, 규제개선 지연, 재정건전성 취약 등 해소되기 어려운 난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에는 단기 금융상품에 30조여 원의 뭉칫돈이 몰렸다고 한다. 초단기 상품인 머니마켓펀드에도 두 달간 20조 원가량이 유입됐다. 기업들이 투자를 줄이며 현금성 자산을 쌓은 결과다. 가계도 마찬가지다. 예금이자가 1%대까지 내려갔지만 예금 잔액은 무섭게 불어나고 있다. 주요 시중은행 5곳의 정기예금이 올해 들어서만 73조여 원 늘었다고 한다. 기회손실이 발생하더라도 은행에 현금을 쌓으며 버티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일본형 장기침체의 판박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엉뚱한 방향으로 간다. 올해 재정적자(1~10월)가 이미 45조 원을 넘어섰는데, 내년에도 60조 원 규모의 빚을 내 ‘경기를 부양하고 성장동력을 확보하겠다’며 슈퍼 적자예산을 통과시켰다. 1990년대 장기불황이 시작됐을 때, 일본도 현재가치로 1천조 원이 넘는 재정을 경기부양에 투입했다. 하지만 천문학적인 빚만 끌어안으며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구조조정과 규제개혁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장기침체에서 벗어나려면 국가경제에 해로운 좀비기업을 구조조정하고, 경제활동을 제약하는 규제부터 제거하는 게 급선무다. 그래야 자원이 보다 효율적으로 이용되고, 개인과 기업의 경제활동 유인구조가 변화됨으로써 경제 전반에 혁신 역량이 강화된다. 노동시장의 경직성, 정부의 시장개입도 같은 맥락에서 소소익선(小小益善)이다. 

그런데 일본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도 모자랄 판에 똑같이 혈세와 빚만 퍼붓겠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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