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 (사)인천언론일클럽 명예회장
김민기 (사)인천언론일클럽 명예회장

인구 50만이 밀집돼 있는 대도시 부평지역 도시 한가운데 미군 부대가 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미군이 인천지역을 점령하면서 당시 부평에 있던 일본 병참기지를 차지해 주둔한 것이다. 현재 주둔 면적은 47만9천622㎡의 거대한 땅이다. 한때는 이곳을 중심으로 부평지역에 수많은 미군 부대가 주둔해 ‘에스컴 시티(ESCOM CITY)’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보다 앞서 이 땅에 아픈 역사가 또 있다. 1910년 한일합병으로 조선을 식민지한 일본은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부평에 병기 제조처인 조병창이 들어선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 땅은 100여 년이란 오랜 세월을 외국 군대가 주둔한 치외법권 지역으로 주민들은 내 땅을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내륙의 섬이었던 곳이다. 

또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 땅은 배신과 탐욕으로 민족의 운명을 팔아넘긴 친일의 역사와 함께한다. 1800년대 말까지 이곳은 부평도호부로 인구 1만여 명의 전원 마을로서 이 땅의 대부분이 우국지사 민영환(閔泳煥)의 땅이었다. 민영환은 대한제국 정부의 각료로서 서구 근대식 제도를 도입하고 자주 민권 운동을 전개했으나, 쓰러져가는 조선을 지키기에 역부족이었다. 일본의 을사늑약(乙巳勒約)을 파기하고 이완용을 비롯해 을사오적 (乙巳五賊)을 처형할 것을 상소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민영환은 2천만 동포와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민영환이 순절하자 부평 일대 1천400여만㎡에 이르는 땅은 우여곡절 끝에 당시 민영환의 식객(食客)으로 정미칠적(丁未七賊)중의 한 사람이었던 송병준(宋秉畯)에게 넘어간다. 그 후 송병준의 후손들로부터 오랫동안 국가를 상대로 한 소유권 주장을 해왔으나 결국 친일재산 특별법에 따른 대법원 판결에 의해 모두가 국가 소유로 결정된 역사 속의 굴곡진 땅이다. 

이런 뼈아픈 역사를 지닌 이 땅이 이제 우리 인천시민에게 돌아온 것이다. 80년 걸렸다. 한국 근현대사의 수난을 상징하는 잊혀진 땅 금단의 땅에서 돌아온 것이다. 

외교부가 지난 11일 미군 측과 제200차 주한미군지위협정(駐韓美軍地位協定. SOFA)합동회의를 개최하고 부평 미군 부대 전체를 반환하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제 남은 것은 반환받는 56만여㎡의 대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오염된 토양 제거다. 환경부가 미군 측과 공동으로 환경 평가를 한 결과 이곳에 토양과 지하수에서 1급 발암물질인 ‘다이옥신’과 유류, 중금속이 발견됐다. 이번 조사는 2015년 7월과 2016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실시했는데 일본과 독일의 정화 기준(1천 Pg)의 10배가 넘는 수치가 나왔다는 것이다. 이는 수십만 명이 사는 부평지역 주민들에게 다이옥신 등 맹독성 물질에 노출돼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반환 받는 56만여㎡의 이 땅을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오염된 토양 제거부터 기존 건물들의 활용방안 등에 대해 의견이 다양하다. 어느 한편의 주장보다는 주민 전체의 의견을 수렴하는데 근간을 둬야 할 것이다. 백년대계의 바탕에서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그간 인천시도 부평 미군부대 반환에 대비해 2012년부터 반환 주변 지역 주민을 포함한 시민참여회를 구성해 60여 차례에 걸쳐 콘퍼런스, 설명회, 간담회 등을 통해 시민과 소통하고 공감대를 마련해오고 있다. 

인천시와 부평구도 좀 더 구체적인 실용적인 방안을 도출하기 위한 ‘라운드테이블’을 운영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문가와 시민토론으로 이어지는 라운드테이블을 통해 2021년까지 지구단위 계획을 확정한다는 것이다. 부평은 인천과 다른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도시로 성장했다. 일제의 조병창에서 미군의 에스컴 시티의 다른 역사를 겪으면서 부평의 타자성(他者性)이 형성돼 왔었다. 한때는 부평에서 인천은 시외전화였다. 이번 부평미군기지 반환을 시점으로 인천시 발전 변화에 동참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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