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부터 집착의 씨앗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상대방을 전적으로 믿게 하고, 그 믿음은 하나의 신념을 형성하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 사람의 말 한마디나 행동 하나하나에서 단점을 발견할 수가 없게 돼 그가 마치 완전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늘 불안합니다. 그렇게 완전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놓아둘 리가 없을 테니까요. 이때부터 집착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볼 수가 없어 불안감은 극대화되고, 해소되지 않는 불신감은 다툼으로 이어지며, 급기야 이별의 빌미가 돼버리기 일쑤입니다.

사람에 대한 집착뿐만 아니라 신념에 집착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 대한 집착은 두 사람의 불행으로 그치지만, 신념에 대한 집착은 사회에 엄청난 파괴로 이어지곤 합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자신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통해 한 사람의 왜곡된 신념이 얼마나 큰 불행을 자초하는지를 증언합니다. 

중세의 어느 수도원은 세상에서 가장 많은 책을 보유하고 있어서 세계 전역의 수도사들이 공부하러 많이 왔습니다. 그런데 원인 모를 이유로 수도사들이 한 명씩 차례로 살해당합니다. 마침 공부하러 온 윌리엄 수도사가 이 연쇄 살인사건을 추적해 나갑니다.

수도원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호르헤 신부와 윌리엄은 사사건건 부딪칩니다. 한 예로, 호르헤는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즐거움은 신이 원하는 올바른 삶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삶이라고 말하지만, 윌리엄은 "신은 가장 왜곡된 것을 통해서도 영광을 드러낸다. 괴이한 형상에 깃든 비밀은 체득하기도 수월하니까"라고 받아칩니다. 그러니까 호르헤 신부는 신을 믿는 인간이라면 삶이 늘 경건해야 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웃음 따위는 신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윌리엄 수도사는 신은 가장 심하게 왜곡된 사물을 통해서도 나타난다고 말할 정도로 열린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요.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누구나 배움이나 경험 등을 통해 자신만의 신념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배움이나 경험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다면 한 사람의 신념만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과 다른 믿음이 마주칠 때는 충돌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살인사건을 파헤치던 윌리엄은 드디어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됩니다. 바로 수도원의 도서관에 소장돼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나오는 ‘희극론’ 때문이었습니다. 희극론에 나오는 문장, 즉 "웃음은 권위를 비판하고, 경건함을 조롱하며, 절대성을 파괴한다"라는 문장이 신의 권위와 경건함과 절대성을 훼손시킨다고 호르헤 신부는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도사들이 그 책을 읽지 못하도록 책에 독을 발라놓았고, 그것이 연쇄살인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호르헤 신부의 왜곡된 신념은 자신만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시학」 책을 영원히 없앨 요량으로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찢어 불태우고 있는 것을 목격한 윌리엄이 말리려고 하자, 호르헤는 등불을 던져 책들이 소장된 방에 불을 질렀고, 윌리엄 수도사는 책을 구하겠다며 방으로 뛰어듭니다. 이렇게 온갖 책들과 사람들, 그리고 수도원 전체가 화염 속에서 사라져버립니다. 

자신의 신념대로 살아가는 것은 죄가 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신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어져야 할 ‘적’으로 규정하게 되어 결국 심각한 분열과 다툼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나’와 ‘너’ 모두 불행의 늪으로 빨려 들어가 모두를 공멸하게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이제 ‘나’를 돌아볼 시간입니다. 집안에서의 ‘나’, 직장에서의 ‘나’는 혹시 호르헤 신부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을 저 자신에게 해봅니다. 그리고 섬뜩 놀랍니다. 찔리는 구석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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