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흥구 인천문인협회이사
황흥구 인천문인협회이사

정년퇴직하고 몇 년 동안 일하다 손 놓은 지도 벌써 2년 차다. 퇴직하면 집에서 이제 좀 푹 쉬면서 마음껏 놀러 다니자고 한 다짐이 그렇게 녹록지가 않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여행도 다니고 좋아하는 등산도 하면서 평소 배우고 싶었던 중국어도 배우느라 일주일에 두 번은 주민센터에 나가고 국궁에 푹 빠져 궁도장에 살다시피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집에서 보내는 날이 많아졌다. 40여 년 공직생활 하면서 과장님, 국장님 소리 들어가며 일할 때는 내가 제일인 줄만 알았는데 막상 나와 집안일 좀 거들자니 모든 게 낯설고 서투르다. 여전히 아내가 밥해줘야 먹고 빨래해 줘야 입을 수 있고 청소마저 아내의 손을 거쳐야 비로소 집안이 훤해진다.

그동안 큰소리치며 살아왔지만 퇴직하고 나니 뭣 하나 아내보다 잘하는 것이 없다. 이제 와서 새삼스레 빨래하기도 그렇고 멀쩡한 마누라 놔두고 새벽에 일어나 밥하기도 그렇지 않은가? 그래도 요즘 아내의 조수 역할은 톡톡히 해낸다.

지난 주말에는 동네 테니스클럽 월례대회에 참석하려고 라켓을 챙겨 들고 나가려던 참에 뒤통수에 대고 같이 이불 좀 빨고 나가라는 것이 아닌가. 찬바람 날 때부터 덮고 자던 이불을 빤다는데 마다할 수 없었다.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 놓고 세제를 넣은 다음 질겅질겅 밟는 것이 별것 아니다 싶었는데 다 빨고 몇 번 헹구어 건져내 물기를 뺀 다음 옮겨다 너는 일이 더 힘들었다. 아내는 몇 년 전 손녀까지 키우며 살림하는 것이 버거웠던지 허리 병으로 병원 신세까지 진일이 있어 무거운 것을 잘 들지 못한다. 그 이후로 세탁기에 넣고 돌려 빤 옷가지나 양말, 수건 등을 베란다에 너는 일은 내 차지가 됐다.

아내가 세탁 시간에 맞춰놓은 빨랫감이 빙빙 돌아가다 멈춰 서면 이내 기다렸다 냉큼 집어내어 탁탁 털어 베란다에 거치된 건조대에 너는 것이다. 아내는 결벽증이라도 있는 양 집안에 손녀가 먹다 흘린 과자 부스러기나 조그만 검불 하나라도 떨어져 있으면 난리가 난 것처럼 호들갑이다. 나는 그럴 때마다 진공청소기를 끌어내 몇 번이고 돌린다. 

어떤 때는 마룻바닥이 깨끗해도 아내가 외출하고 돌아올 때면 청소기를 붙들고 한번 돌릴까? 물으면 금세 얼굴이 환해진다. 그렇다고 아내는 보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두 팔을 걷어붙이고 두 무릎을 꿇고 안방부터 거실, 주방이 있는 데까지 식탁 의자를 밀치고 구석구석 걸레질을 해낸다. 

그러고 나서 의자에 올려놓은 방석을 비롯해서 소파에 깔아 놓은 깔개, 침대 위의 이불이나 담요까지 확 끌어내면 그 기세에 눌려 재빨리 주워 모아 터는 일 또한 내 몫이다. 터는 일도 쉽지 않다. 베란다 창문을 열고 털다가 두꺼운 이불을 놓치거나 허리춤까지 올라온 안전방책이 있다지만 잘못하다간 무거운 이불과 함께 윗몸이 앞으로 쏠려 떨어질 위험도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널고, 돌리고, 터는 일은 조수 역할뿐이 못 된다. 아직도 난 아내가 혼자 여행가고 없을 때 가끔 밥을 해보지만 질거나, 되거나 탄 밥을 먹기 일쑤다. 

아내가 세탁기에 빨랫감을 넣고 외출하고 없을 때 무엇을 눌러야 세탁기가 돌아가는지 낑낑대기 일쑤다. 안방에는 화투장만 한 난방조절 장치가 벽에 붙어 있지만 난방, 절약, 타이머 표시가 그게 그것만 같고 무엇을, 어떻게 눌러야 온도가 맞춰지는지 퍼즐게임보다 더 어렵다. 

이것 말고도 거실 벽에 책받침만 한 모니터에서 어느 날 택배기사가 문을 열어 달라는 소리가 나기에 잘못해 비상 버튼을 눌렀더니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울려 택배기사가 기겁하고 돌아간 일도 있다. 형광등을 갈다가 떨어뜨려 박살 내질 않나 선풍기를 조립하다 바람개비를 부러뜨린 이후로 무슨 손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Midas’(미다스) 손인지 만지면 사고가 난다며 아내는 아예 만지지를 못하게 한다. 그러나 그나마 잘 할 수 있는 것이 있어 다행이다. 아내가 가끔 "빨래 좀 널어요, 이불 좀 털어요, 청소기 좀 돌려요" 하고 말할 때마다 난 신나게 달려간다. 아내에게 점수 따는 게 최고의 노후대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 남자의 날개가 꺾일 때는 언제부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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