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수 인천문인협회 감사
김완수 인천문인협회 감사

아끼는 보물 중에 누렇게 바랜 손 편지들이 있다. 소중한 추억들이 담겨 있는 것들이라 버리지 않고 사진첩에 넣어두고 가끔 꺼내서 읽어본다. 지난날 여고에서 교편생활을 할 때, 스승의 날이면, 나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예쁜 색깔의 편지지에 깨알같이 앙증맞은 글씨로 적은 편지를 다른 학생들 몰래 건네줬다. 이유는 다른 학생들이 보면 질투심이 많은 사춘기 여학생들이라 아무개가 아무개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소문을 내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수줍음으로 얼굴이 붉게 물든 여학생이 쉬는 시간에 교무실을 찾아와 초콜릿 과자를 건네고 총총걸음으로 돌아갔다. 나는 평소에 과자를 좋아하지 않아서 별로 반갑지 않게 받아든 채 무심코 겉껍질을 찢었다. 그런데 과자 껍질 속에 곱게 접은 손 편지가 들어 있었다. 

내용은 선생님을 사모한다는 고백과 함께 모처에 있는 음악 감상실에서 몇 시에 만나자는 것이었다. 당황스럽게도 선생님이 올 때까지 무조건 기다린다는 말이 끝부분에 빨간 글씨로 적혀 있었다. 그때만 해도 교편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순진한 시절이라 한참 동안 고민을 하다가 그 학생을 만나러 나간 적이 있다. 내가 학창 시절 때는 펜팔이 유행이었다. 이성 교제가 자유롭지 못하던 그때에는 미지의 이성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게 여간 설레는 일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생 잡지에 광고된 펜팔을 주선해주는 회사를 통해 필리핀에 사는 여고생과 편지를 주고받게 됐다. 영어 실력이 부족해 펜팔 책자들에 나오는 영어 예문들과 한영사전을 참고해 며칠 동안씩 진땀을 흘리며 쓴 편지를 보냈다. 당시에는 우편물이 왕복 6주나 걸렸기 때문에, 편지를 보낸 직후에 도착 예정일을 달력에 표시해놓고 손꼽아 기다렸다. 외국 여자로부터 처음 손 편지와 사진을 받았을 때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받은 편지를 다음 편지 받을 때까지 읽고 또 읽으며 장차 결혼할 애인이라도 되는 듯이 그리워했다. 친구들을 만나면 펜팔에 대한 자랑으로 이야기꽃을 피우며 서로 편지들을 보여주곤 했다. 

손 편지에 대한 안타까운 추억도 잊히지 않는다. 대학교 4학년 때 교회에서 권하는 전국수련회 모임에 참여했다. 거기서 우체국에 근무하는 여성을 알게 됐는데, 집에 돌아가면 자기가 먼저 편지를 한다고 했다. 한동안 들뜬 마음으로 기다렸지만, 편지는 오지 않았다. 나에 대한 호감을 표시했었는데 왜 편지를 하지 않았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아쉬운 마음을 접고 말았다. 그런데 일 년쯤 지난 어느 날 하숙집 대청소를 하다가 하숙집 딸의 책장에서 내 이름의 편지를 발견하게 됐다. 읽어보니 지난해 수련회 때 만난 여자의 손 편지였다. 하숙집 딸에게 편지에 대한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봉투를 보고 어떤 여자로부터 남학생에게 온 편지라 호기심이 발동하여 슬며시 뜯어보고 미안해서 나에게 전해주지를 못하고 자기 책장에 꽂아두었다고 했다. 화나고 서운한 마음을 무척이나 견디기 힘들었다. 더 어린 시절의 손 편지에 대한 가슴 아픈 추억도 생각난다. 아마 사춘기가 시작하던 중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 나는 버스 통학을 했는데, 어느 날 버스 안에서 호감이 가는 여학생과 대화를 나눴다. 헤어질 때 그녀로부터 간단한 사연과 주소가 적힌 핑크색 쪽지 편지를 받아 교복 주머니에 넣었다. 마음은 하늘을 나는 풍선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며칠 뒤 너무나 실망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어머니가 나에게 말도 없이 교복을 빨았는데 주머니에 넣어둔 편지가 짓이겨져서 글씨를 알아볼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 편지에 대한 말도 못 하고 며칠 동안 얼마나 애석해했는지 모른다. 나의 학창 시절엔 상대방에게 직접 건네거나 우편물로 보내는 방법밖에는 손 편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없었다. 연애편지를 우송하는 경우, 상대방 부모가 뜯어보고 전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야단맞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초조함과 그리움으로 답장을 기다리다가 받았을 때의 극적인 희열은 형언할 수가 없었다. 

어렵사리 받아든 편지는 일급 보물이라도 되듯이 잘 보관했다가 은밀한 시간에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봉투를 열어 읽고 또 읽으며 그리움과 환희로 심장을 불태우며 잠 못 이뤘다. 편지 속의 주인공 여학생은 지금은 어디에 살며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 읽을 때마다 진한 그리움과 낭만적인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손 편지! 그 아름답고 소중한 매력을, 문자 메시지나 카톡 메시지를 눌러대며 한 시간도 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문자를 무시했다고 상대방에게 짜증을 분출하는 요즘의 학생들이나 젊은이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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