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맺은 근대 조약
상태바
인천에서 맺은 근대 조약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 기호일보
  • 승인 2020.05.22
  • 11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1882년 5월 22일(이하 모두 양력) 인천 제물포 ‘해관장 사택 터’인 현재의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 위 부근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됐다. 조약은 서양과 맺은 첫 번째 의미로서, 일본과 무관세(無關稅)로 일관돼 온 관세행정에 수입품의 경우 10~30% 관세와 미국 상선에 대해 톤세를 부과할 수 있었고 잠정적으로 미곡 수출을 금지할 수가 있었으며, 인천항에 있어서는 평상시에도 일체의 미곡 및 양곡 수출을 금지하도록 규정했다. 그간 조선 정부의 숙원문제였던 관세 자주권과 곡물수출 금지권을 획득할 수 있었기에, 그야말로 일본의 침략을 막고 서양과 ‘대등하고 부강한 국가’로 발전하겠다는 고종의 의지를 천명하기에 충분했다. 이때 미국의 전권특사 슈펠트는 조선의 대표인 신헌과 김홍집에게 국기(國旗)를 만들어 조인식에 사용할 것을 요구했고 이에 역관 이응준이 태극사괘로 알려진 태극기를 만들게 됐다. 이 태극기는 조인식 날 미국 국기와 나란히 게양됐으며 미국은 독립운동 군가(軍歌)이면서 당시 유행하던 애국의 노래 ‘양키 두들’을 연주했다 한다. 

그러나 10여 년 전인 1871년 신미양요는 쇄국양이정책을 더욱 강화해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척화비를 부정하고 구미열강들 중에서 제일 먼저 선택한 국가가 미국이었다. 이렇게 된 연유에는 우리 정부의 의지와 청국의 철저한 계산이 혼재해 있었다. 조선 정부는 자주권과 일본과 무관세 무역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조약 개정을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일본 측에 의해 번번이 거부됐다. 이에 새로운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서양제국과 통상관계를 수립할 필요가 있었던 반면, 일본은 조선에 구축한 정치, 경제적 기득권을 독식하고자 했기에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게 중개해 달라는 미국의 요청마저도 교묘하게 회피하고 있었다. 

청국 또한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이 조선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자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것을 매우 당혹스러워 했다. 이에 1879년 8월께 일본을 견제하고 러시아의 남침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구미 각국과 통상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조선에 권고했다. 이홍장은 황준헌(黃遵憲) 등을 시켜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김홍집을 설득해 ‘연미론(聯美論)’을 구체화시킨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완성했다. 그리고 말미에 1878년 미국이 미일관세 개정협의를 통해 일본의 관세 자주권을 인정해 준 사례를 들어 서구 열강 중에서 미국과 먼저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권유했다.

1880년 조선 정부는 청의 권고를 받아들여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 미국과 우선적으로 조약을 체결하겠다는 방침을 세워두기에 이르렀다. 청국은 이로써 조선에 대한 일본의 외교적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조선에 대한 외교적 조언자로서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조미조약 체결 후 곧이어 주청영국공사 웨이드는 이홍장에게 영국과의 조약을 청탁했고 중국 관리 입회 아래 행해져야 한다는 단서 아래 1882년 6월 6일 인천에서 조영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2주 만에 전격적으로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에 대한 견제도 한몫했다. 독일 역시 주청독일공사 브란트의 알선 요청에 따라 같은 방식으로 6월 30일 인천에서 조독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조약 내용은 조미조약과 별 차이가 없었고 체결 장소는 조미조약 장소를 재차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영국정부는 최고 3할에 이르는 고율의 관세부과 등에 대한 불만 때문에, 독일과 공조체제를 구축한 후 비준을 거부했다. 결국 재협상을 통해 다음 해 1883년 11월에서야 이뤄졌는데, 영국이 원하는 모든 이권을 차지하게 됐고 이미 조약을 체결했던 국가들까지도 ‘최혜국 대우’ 조항을 통해 혜택을 봤다. 농업사회가 근간이었던 조선으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불평등 조항들이었고 조선의 관세수입에 계산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엄청난 손실을 안겨준 계기가 됐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관세 문제뿐 아니라 여러 조약들이 현재도 진행 중이다. 무엇이 우리에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역사를 통한 혜안이 필요한 때이다.

기호일보, KIHOILBO

▶디지털 뉴스콘텐츠 이용규칙 보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