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가 클럽에서 ‘부비부비’하던 시절 얘기다. 당시 끝에 ‘19’라는 아라비아 숫자가 붙은 듣보잡 전염병이 창궐해 온 세상을 어지럽혔다. 이 놈은 조선반도에도 상륙해 해괴한 종교단체와 젊은이들이 주로 드나드는 클럽이라는 약한 고리를 공략하면서 백성들을 비탄에 빠트렸다. 한때 확진자 수가 수직상승하고 사망자도 270여 명이 발생했으나, 관리들의 피나는 노력과 백성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확진자가 1만1천 명 선에서 유지됐다.

조정에서는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온 고을에 방을 붙여 사회적 거리두기를 권장했고, 백성들도 가능한 한 낮마실과 밤마실을 자제하며 호응했다. 불가피하게 출타를 할라치면 입가리개를 착용했다. 

백성들의 모임과 외출을 자제시키다 보니 특히 장사를 해서 입에 풀칠을 하던 서민들의 삶이 말이 아니었다. 급기야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나랏님의 결단으로 조정과 지방관아에서 곳간을 열었다. 덕분에 백성들은 웃음을 되찾았으나 고을 관리들의 업무는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Y라는 고을에도 관아에 이를 담당하는 관리들이 있었는데, 업무가 폭주하다 보니 자체 인력으로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관아에도 수천 명의 관리들이 상주했지만 각자의 업무가 따로 있는데다 결원이 많아 해당 업무에 파견할 여유가 없었다.

당시 Y고을에는 ‘의외’라고 불리는 백성들의 대의기관이 있었다. 그곳에서도 원님이 인사권을 쥐고 있는 관리들이 업무를 수행했다. 물론 대의기관의 ‘위치’를 고려해 전보나 파견 등 인사를 할 경우 대의기관 수장과 협의를 거쳤다. 궁리 끝에 Y고을 관아 인사부서에서 대의기관 수장에게 관리 2명의 파견을 요청했고, 대의기관 수장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 같은 사실을 뒤늦게 안 A·B마을 대표가 핏대를 세웠다. 원님과 대의기관 수장이 함께한 자리에서 파견 관리들의 원대복귀를 요구하는 월권도 서슴지 않았다. 원님 역시 파견의 적절성과 불가피성을 설명하기보다는 이들의 ‘땡깡’에 ‘원대복귀 지시’로 맞장구를 쳤다. 우문에 우답으로 대응한 셈이다. 결국 그들은 2주간의 파견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8일 만에 복귀했다.

그 시절에는 ‘갑질’이라는 말은 없었다. 다만, ‘호의가 반복되면 권리로 안다’라는 말이 백성들 사이에 회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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