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외로워 외로워서 못 살겠어요~’로 시작되는 ‘사랑의 종말’이란 노랫말이 떠오릅니다. 사춘기 시절,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이 노래가 가슴을 설레게 했고, 누군가를 사귀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올라오곤 했었습니다. 

‘외로움’은 누군가가 곁을 떠났을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사랑하던 사람이 이별을 통고했을 때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정치를 하고 은퇴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을 땐 사람들이 밀물처럼 밀려들더니만, 그 자리에서 떠나니까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게 보여." 한동안 친구는 무력감에 빠져 무척 힘들어했습니다. 많이 외로웠을 겁니다.

안도현 시인은 「네가 보고 싶어서 바람이 불었다」에서 "살수록 힘들고 외롭다고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휴대전화를 종일 켜놓고 있는데도 외롭다고 한다. 맞다. (…) 외로울 때는 사랑을 꿈꿀 수 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뒤에는 외로움을 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사랑하고 싶거든 외로워할 줄도 알아야 한다. 사랑에 빠지고 싶다면 세상을 아름답게 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라고 조언해주고 있습니다.

외로운 감정은 그 사람이 내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떠나고 그의 빈자리를 볼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떠난 뒤에야 비로소 깨닫곤 합니다. 그 사람이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음을 말입니다. 이렇게 외로움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잘못을 찾아 고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자신의 교만함을 깨닫고 원래의 겸손함으로 돌아가게 하는 소중한 감정이 바로 외로움입니다.

외롭다는 것은 곧 사랑하고 싶다는 갈망입니다. 그것도 제대로 된 사랑을 말입니다. 외로움은 과거 자신이 행한 사랑의 태도보다 한 차원 높은, 즉 예의를 갖춰 사랑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짐하는 계기가 됩니다. 외로움은 우리가 성숙한 사랑을 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렇다면 고독은 외로움과 무엇이 다를까요?

코로나19 덕(?)에 요즘 일주일에 이삼일은 연구실에서 지새우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밤을 지새우며 글을 쓰거나 동영상 강의를 준비하다 보면 문득 ‘외로움’이 밀려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외로움은 ‘고독’과도 같은 감정일 것이라고 애써 위로해봅니다.

고독은 외로움과 다릅니다. 외로움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떠나가는 ‘그’가 결정했기 때문에 견디기가 더욱 힘듭니다. 내가 어떻게 해볼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고독’은 ‘내’가 스스로 홀로되기를 선택한 겁니다. 동이 틀 때까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밤일을 하는 가장의 고독은 스스로가 결정한 겁니다. 그래서 거룩합니다. 친구들이 수다를 떨고 있던 그 시간, 도공은 뜨거운 가마의 열기와 벗하며 구슬땀을 흘립니다. 그래서 거룩한 겁니다. 최고의 도자기를 만들어내려면 가마 앞에서 고독과 벗이 되어야만 하니까요. 그래야 최고의 작품이 나올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고독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열쇠입니다. 변호사 출신의 미국 작가인 수전 케인은 "세상은 외향적인 사람을 선호하지만 정작 세상을 바꾸는 것은 내성적이거나 고독한 사람들이다. (…) 고독은 그야말로 창의성의 열쇠다"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외로움이 사랑할 때임을 깨닫게 해주는 감정이라면, 고독은 창조를 위해 스스로가 홀로 된 세상으로 들어갈 때의 감정입니다. 외로움이 이전보다 더 성숙한 사랑을 위해 꼭 필요한 아픈 감정이라면, 고독은 무언가를 일궈내기 위해 꼭 필요한 설레는 감정입니다. 외로움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변화를 시도하게 하는 감정이라면, 고독은 그렇게 변화된 자신이 스스로 홀로되기로 작정하고 무언가에 도전할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외로우니까 사람이고, 고독하니까 사람입니다. 외로우니까 ‘나’를 되돌아볼 수 있고 새로운 사랑을 할 채비를 갖출 수 있습니다. 고독하니까 그렇게 새로워진 내가 새로운 삶의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로움과 고독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스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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