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산업화 이후 ‘성공’이란 키워드에 매몰되다시피 살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대의 흐름을 민감하게 읽고 변화에 뒤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현대인의 삶 이면에는 무리에서 이탈하는 것이 두려워 정체성을 잃어버린 삶을 살아가는 나약함이 존재한다.
 새삼 남양주시 오남읍 괘라리에서 세상의 온갖 더러운 추태를 멀리하고 고결한 삶을 살다 간 북창(北窓) 정렴(鄭렴, 1506~1549)선생이 그리워진다.
 조금 생소한 인물일 수 있지만 그는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 토정(土亭) 이지함(李之함) 등과 함께 조선시대 3대 기인(奇人)으로 꼽힌다.
북창 정렴이 동생 정작과 함께 지내던 남양주 오남읍에 위치한 오남저수지 전경.
북창 정렴이 동생 정작과 함께 지내던 남양주 오남읍에 위치한 오남저수지 전경.

# 조선시대 3대 기인(奇人)으로 남다

 정렴의 자(字)는 사결(士潔)이며, 북창(北窓)은 그의 별호다. 부친은 우의정을 지낸 정순붕(鄭順鵬)이고, 조부는 사간원헌납을 지낸 대대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1537년(중종 32) 32세의 나이로 과거에 합격해 장악원 주부, 관상감과 혜민서의 교수를 역임했다. 당시 전문직을 천시하는 풍토가 심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반적인 의식에 구애받지 않은 사람됨을 알 수 있다.

 정렴은 포천현감을 마지막으로 관직을 그만뒀다. 

 "세상에 처함에는 겸손하고 물러남을 힘써서 높은 벼슬을 바라지 말고 몸을 낮춰 살 것이며, 권세 있는 집안에 붙어 혼인하지 말라. 시절이 태평하면 벼슬을 해도 되나 세상이 어지러우면 전원으로 물러나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하라." ‘정렴, 「유훈(遺訓)」 북창고옥양선생시집(北窓古玉兩先生詩集) 중에서’

 많은 사람의 존모를 받은 것은 그가 세속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신을 지키고 구차하게 목숨을 보존하는 것을 수치로 여길 줄 알며, 욕망 가득한 세상과 등진 채 높은 덕망을 갖춘 삶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홍만종(洪萬宗)은 「해동이적(海東異蹟)」에서 "유(儒)·불(佛)·선(仙) 삼교(三敎)뿐만 아니라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복서(卜筮)·율려(律呂)·산수(算數) 및 산수화(山水畵)에 능통했는데 스승도 없었고 제자도 없었다"라고 했다.

 # 이인(異人)의 재질(才質)을 타고나다

 정렴과 관련한 특이한 일화들은 도가(道家)의 맥을 잇는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뒷받침한다. 

 한무외의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는 정렴이 배우지도 않고서도 외국어를 구사했으며, 새 소리와 짐승 소리는 물론 백리 밖의 일을 알았으며, 신선이 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도가의 기술은 그의 능력에 기반하는데, 정렴은 실제 젊어서부터 의술에 뛰어났다. 중종을 이어 보위에 오른 인종이 병석에 있을 때 정렴이 들어가 진맥을 하고 처방했으며(인종실록 권2 참조), 임금의 진찰을 전담하는 어의도 치료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38세의 정렴이 약방문에 참여하도록 천거받았다(중종실록 권 105 참조).

 동생 정작도 큰형을 따라다니며 영향을 받아 허준(許浚)이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할 때 ‘유의(儒醫, 선비로서 의술을 아는 학자)’로 참여해 큰 역할을 했다.(이정구, 「동의보감서」 참조)

 정렴은 설화 속에도 이인으로 등장한다. 

 정렴은 아래로 동생이 4명 있는데, 유독 넷째 동생 정담의 부인인 구씨 부인을 귀하게 대접했다. 친척들이 그 이유를 묻자 온양정씨의 후손들은 모두 넷째 제수씨인 구씨 부인에게서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정렴은 넷째 제수씨 친정인 능성구씨의 묏자리를 잡아주며 가문에 훌륭한 후손이 많아 가문이 잘 될 것이라 하기도 했다.

 그 후 정렴의 가문은 화를 만나 후사가 없었는데, 구씨 부인의 아들로 양자를 각각 보내 대를 이을 수 있게 됐고, 능성구씨 집안은 구사맹 등 훌륭한 인물들이 나와 번창했다.

 정렴이 잡아준 묏자리는 군장리(群場里, 현재 남양주 금곡동) 구희경(具希璟)의 묘다.(구수훈(具樹勳), 이순록(二旬錄) 참조)

1 ‘해동전도록’. 한무외가 우리나라 도가의 맥을 기술한 책. 정렴과 그 도가 저술이 기록돼 있다. 2 ‘삼현주옥’. 성수익이 편찬한 정렴 송인수 등의 시를 모아 간행함. 3 ‘북창고옥양선생시집’. 후손들에게 세상과 영합하지 말고 살라는 정렴의 유언이 담겨 있다. 4 ‘자만’. 정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애도한 시. 5 ‘궁궁을을가’. 정렴이 지었다는 도가 관련 가사로 전해짐.
1 ‘해동전도록’. 한무외가 우리나라 도가의 맥을 기술한 책. 정렴과 그 도가 저술이 기록돼 있다. 2 ‘삼현주옥’. 성수익이 편찬한 정렴 송인수 등의 시를 모아 간행함. 3 ‘북창고옥양선생시집’. 후손들에게 세상과 영합하지 말고 살라는 정렴의 유언이 담겨 있다. 4 ‘자만’. 정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애도한 시. 5 ‘궁궁을을가’. 정렴이 지었다는 도가 관련 가사로 전해짐.

# 참된 부자의 도리를 지키다

 정렴은 유불선 삼교에 정통했지만, 사고와 행동을 관통하는 것은 공자의 사상을 기준으로 한 인륜(人倫) 중시 사상이었다.(허목, 「청사열전」 참조) 

 정렴의 부친인 정순붕(鄭順朋)은 명종 임금 때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중심인물 윤원형, 이기와 함께 을사삼간(乙巳三奸)으로 일컬어진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은 정권 장악을 위해 반대 세력 제거에 나섰다. 정렴은 부친이 사화에 참여해 사람들을 죽임에 처하게 하는 것을 극렬히 반대해 매일 아버지가 관복을 입기만 하면 울면서 가지 못하게 간청했다고 한다.

 사화에 앞장선 동생 정현은 윤원형과 이기의 집을 오가며 사건을 기획하고 움직이는 일을 모의하고, 사화에 반대하는 큰형 정렴을 죽이려고도 했다.

 정렴은 바르지 않은 권력을 위해 사람을 헤치려는 일을 하려는 아버지와 동생을 끝까지 간곡하게 만류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곧바로 포천현감직에서 물러났다.

 을사사화에 죽은 사람이 100여 명이 넘었다고 하니, 많은 희생에 원망이 따랐던 것은 분명하다.

 정렴은 ‘청광(淸狂, 거짓으로 미친 척하며 고고하게 사는 사람)’을 자처하며 세상의 원망을 안고 괘라리로 들어와 다시는 출사하지 않았다.(조경, 북창선생청광변(北窓先生淸狂辨) 참조)

  # 한국 도교사의 중심인물로 기록되다

 정렴은 혼탁한 세상을 등지고 현재의 오남읍으로 옮겨와 고결한 뜻을 지닌 채 살아갔다. ‘하루에 천종의 술을 마시고, 고상한 이야기만 하고, 속된 이야기 입에 담지 않고’(정렴, 자만(自挽) 참조) 살았다. 

 찰나의 순간,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릇된 선택으로 일관하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보면 그는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혼탁한 세상에서 찾기 어려운 유형의 인물이라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소중하다 할 수 있겠다.

 그의 숨결이 살아 숨 쉬고 있는 남양주시에서 현실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져 보면 어떨까?

남양주=조한재 기자 chj@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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