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아’에게서 배운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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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에게서 배운 지혜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 기호일보
  • 승인 2020.06.12
  • 1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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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재수할 때였습니다. 새집을 짓기 위해 매입한 빈집에서 홀로 공부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갓 태어난 셰퍼드 한 마리를 주시며 키워보라고 했습니다. 이름은 ‘아리아’였는데, 아주 똑똑한 녀석이었습니다. 저는 침대에서 자고, 녀석은 바닥에 놓인 종이상자 속에서 잤습니다. 한참을 지나 인기척이 느껴져 눈을 떠보면 어느새 녀석이 제 곁에서 새록새록 자고 있었습니다. 저렇게 작은 녀석이 올라오기에는 무척 높은 침대인데 어떻게 올라왔는지 궁금했습니다. 녀석은 종이상자를 입에 물고 와서는, 상자를 뒤집어놓고 그걸 계단 삼아 올라왔던 겁니다. 

녀석은 하루가 다르게 몸집이 커갔습니다. 얼마나 많은 양을 먹던지, 저는 틈만 나면 동네 식당들을 돌아다니며 남은 음식을 구해와야만 했습니다. 몇 달이 지나자 녀석은 한 끼에 양동이의 절반 정도를 거뜬히 먹어치웠습니다. 끼니마다 녀석의 식사를 마련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괜찮았습니다. 녀석이 먹는 걸 보면 행복했으니까요.

이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친구가 됐습니다. 혼자 공부해야 하는 재수 생활이 무척 힘겨웠고, 특히 밤을 지새우는 동안 외로움도 컸습니다. 그러나 녀석이 온 뒤로는 그런 외로움도, 공부에 대한 중압감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이 돼 줍니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내가 기꺼이 내어주고, 내게 결핍된 부분을 그가 채워주는 사이가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아리아로부터 배웠습니다.

8개월쯤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아리아가 없어졌습니다. 온 동네를 다니며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개를 훔쳐간 나쁜 사람을 원망도 했습니다. 분노도 일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누가 훔쳐간 게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아리아를 준 것이었습니다. 무척 서운했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따질 수는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서운하고 원망스러운 마음도, 아리아를 그리워하는 마음도 시간이 흐르면 엷어지나 봅니다. 그렇게 아리아는 제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대학 1학년을 마칠 즈음에 아버지가 서류 하나를 주시며 어느 곳에 갖다 주라고 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언덕을 올라갔다 내려오기를 반복하며 드디어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은 동네 가게들이 모은 빈 병들을 모아놓은 지붕 없는 큰 창고와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울타리 안쪽 둘레에는 온통 빈 병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계세요?"를 외치며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커다란 개가 저를 보고는 짖으며 달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덩치를 보니 녀석은 개가 아니라 마치 황소와도 같았습니다. 온몸이 얼어 붙어버렸습니다. 도망가려고 했지만, 몸이 굳어져 꼼짝도 할 수 없어 그냥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이젠 죽었구나’라는 생각으로 체념하고 있던 그 순간, 녀석의 앞다리가 제 양쪽 어깨 위에 올려지더니, 제 얼굴을 핥아대기 시작했습니다. ‘아리아’였습니다. 2년 가까이 헤어져 있었고 저는 녀석을 그새 잊고 살았는데, 아리아는 저와 달랐습니다. 아리아에게 미안했습니다. 개가 사람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해봤습니다. 

「바보 되어주기」라는 책에 초보운전자인 아내가 남의 새 차를 들이받은 사례가 나옵니다. 얼굴이 백지장이 된 아내는 사고가 나면 차에 있는 서류봉투 속 메모지를 보라던 남편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메모지를 꺼내 읽었습니다. 아내 눈에 눈물이 고이더니, 이내 얼굴이 환하게 피어 올랐습니다. 메모지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여보, 만약에 사고를 냈을 경우 꼭 기억해요. 내가 가장 사랑하고 걱정하는 건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

참 아름다운 부부입니다. 아무리 힘겨운 일이라도 염려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능히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사랑이란 그 사람 곁을 끝까지 함께하려는 마음입니다. 아리아처럼 그리고 메모를 남긴 남편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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