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국 인천공예협동조합 이사장
윤성국 인천공예협동조합 이사장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엄격한 신분제도가 있었고 문인들이 최고의 지배계급인 나라였다. 그 속에 ‘쟁이’들은 부모의 신분이 자식의 신분이 되고 부모의 업이 자식의 업이 되었기에 개인의 소질이나 미래의 희망과는 동떨어진 일을 할 수 밖에 없었고, 큰 목표는 고사하고 작은 기대조차 가질 수 없던 그 시절에는 오늘날과 같은 눈높이를 갖는 것 자체가 꿈 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는 지금 잣대로 보면 말이 안 되는 여건 속에서도 ‘쟁이’들이 도맡아 하던 모든 선, 문양, 기법들을 자발적으로 발전시킬 만큼의 눈썰미와 손재주가 남다른 민족이었다는 것이며 우리 눈의 눈썹은 줄자였고, 우리 손의 지문이 곧 도구였던 것이다. 

 현재에는 ‘쟁이’들이 만든 생활도구에 미적 감각이 더해진 것을 예술품 또는 공예품이라 부르기도 하고, 그 이름에 걸 맞는 뛰어난 작품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지만 과거 조선은 손으로 할 수 있는 도구 외에 변변한 기계공구 하나 없는 그야말로 핸드메이드 수준이었는데 쇄국정책으로 인해 전혀 개량되지 못한 채 맞닥뜨린 일제 강점기에서야 비로소 개량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접하는 서구식 기계장비와 생소한 용어, 처음 보는 도면 등은 한 분야에 일생을 바친 ‘쟁이’ 들 마저도 꿔다놓은 보릿자루로 만들기 충분했을 것이다. 

 일제식민지 초기에 농사를 비롯한 전 국토 구석구석의 용어와 기술의 계몽을 도맡아 했던 조직이 YMCA라는 것, 그리고 그 의도와 결과 역시 우리 쟁이들은 한번쯤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무슨 일이든 우리의 존재이유와 그에 따른 감사함이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당시 세대를 생각하면 선진화된 문명을 주어지는 대로 배우고 쫓아가느라 애쓰면서도 눈에 보이는 차별에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괜히 죄송스런 마음이 된다. 

 일제의 지배를 받으며 일본에 의해 서구 신기술과 대형 장비들을 접할 기회를 가졌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다. 

 해방을 맞고 미소군정을 거쳐 6.25 이후부터 미국의 원조를 받던 1959년까지, 우리는 그저 일제 때 개량된 단순반복 작업을 배운 산업화의 초보단계에 불과했으나 1960년대 산업화는 잘 만들어 많이 팔면 팔수록 돈을 벌게 되는, 즉 기술이 좋고 손이 빠를수록 돈이 되는, 이전까진 겪어보지 못했던 바로 그때부터가 기회와 발전의 희망시대가 열린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바야흐로 나이, 학력, 재산, 가문으로 평가받는 세상이 아니라 좋은 기술에 성실함만 갖춰도 사람대접을 받는 세상이 된 것이다. 

 달빛에 조각칼을 갈고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백열전구 불빛아래 갈이틀을 돌리던, 30여년간 무한반복을 통해 쌓인 기술은 단군 이래 최고의 기술이자 세계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는 기술로 성장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 특유의 눈썰미와 손재주만큼은 서구의 대표적인 장인들조차 혀를 내두르는 실력임에는 틀림이 없겠으나, 체계적 교육을 받지 못하고 안전에 대한 경각심과 직업에 대한 긍지를 갖지 못한 점은 지금도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피땀이 지금의 번영임을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지금의 세대가 과연 알기는 할까? 하는 궁금증이 이 시점에서 문득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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