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군함
상태바
한국 최초의 군함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 기호일보
  • 승인 2020.06.19
  • 10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조선은 개항 전부터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사건 등으로 여러 차례 수난을 당하고 있었다. 당시 화륜선과 대포까지 장착한 외국 함선은 공포의 대상이었던 만큼 그러한 화륜선을 보유하고 싶은 욕망도 커져만 갔다. 그리고 개화기 지식인들은 "지금 세계의 강약은 육군이 아닌 해군에 의해 판단되며 해군이 있다면 조선의 권리를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교역에도 이점이 많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당시 해군은 국력의 상징이었다. 

고종은 승려 이동인에게 왕실 비자금으로 비밀리에 일본에서 군함을 구입하라 밀명을 내리지만, 수구파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함으로써 첫 시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이어 인천의 독일계 세창양행에 차관으로 군함 구입을 의뢰했고 또 평안도 탄광채굴을 조건으로 영국과도 교섭을 진행했다. 황성신문 등 국내 언론은 군함을 구입할 재정 능력 결여를 이유로 반대했지만, 그보다 일본은 모든 첩보망을 동원해 조선의 군함 구입을 원천 봉쇄하고 있었다. 조선의 군사력 증강을 좌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군함 구입이 여의치 않자 고종은 군함 구입에 앞서 해군을 양성하기 위해 영국총영사에게 해군 교관 파견을 요청하고 이어 1893년 강화읍 갑곶리에 한국 최초 ‘해군사관학교’를 설립했다. 인천이 개항한 지 10년이 되던 해였다. 이해 9월 14~20세의 사관생도 38명과 17~23세의 수병 300여 명으로 출범했는데 이것이 바로 ‘통제영학당’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도 해군력 증강을 우려하는 일본의 방해 공작과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한 교육기관으로 전락, 폐교됐다. 이때 훈련교관이었던 콜웰이 영국의 순무 종자를 가져와 강화읍 갑곶리 사택 주변에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군함을 향한 고종의 꿈은 양무호 구입으로 이뤄졌다. 양무호는 원래 1888년 영국에서 건조한 팰라스(Pallas)호라는 화물상선으로 1894년 일본 미츠이물산이 25만 원에 구입해 일본∼홍콩 간 석탄 운반선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능은 부실한데 연료 소모량은 많고 게다가 자주 기관 고장을 일으켜 처치 곤란 상태에 있었다. 이에 미츠이물산은 일본 정부와 은밀한 거래를 통해 구식 함포 4문을 부착해 군함으로 개조했고, 이것을 1903년 조선 정부에게 55만 원에 양도했다. 당시 국방예산의 30%에 달하는 거금이었기 때문에 군함 계약 파기 움직임이 있었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나라의 힘을 키운다’는 뜻의 양무호(揚武號) 명칭은 고종이 직접 지었다. 1903년 4월 16일 인천항에 닻을 내린 양무호 크기는 전체 길이 105m에 3천400여 t짜리 철선으로 당시로서는 초대형 선박이었다. 그 위용은 고종을 흡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양무호 초대함장은  박영효의 추천으로 관비 일본 유학생으로 선발돼 동경상선학교에서 근대식 항해 교육을 받았던 인천 출신 신순성을 임명했다. 그러나 하루 석탄 43t이라는 막대한 운항 비용을 감당할 여력도 없는 형편이었고, 그나마 구입대금을 지불하지 못해 4개월여 동안 인천항에 억류되는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공교롭게도 이해 4월 30일은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기로 예정돼 있었기 때문에 예포(禮砲) 발사를 위한 과시용 구입이라는 구설수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어극40년칭경예식(御極四十年稱慶禮式)’이라 명명된 기념식은 원래 전 해인 1902년 10월에 실시하려 했지만 그해 여름 콜레라가 번져 1903년 4월 30일로 연기됐던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여섯 살이던 황태자 이은이 천연두에 걸리자 다시 9월 26일로 기념식 날짜를 공고하기에 이르렀다. 1903년 6월 황성신문은 "한 명의 수병도 없는 상황에서 군함을 사들여 재정을 낭비했다"고 맹렬히 비난하고 있었다. 그 후 양무호는 러일전쟁 당시 무단 징발됐다가 1909년 경매를 통해 일본 하라다상회에 4만2천 원에 매각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해야 했다. 

한국 최초의 군함 양무호 구입은 조선의 절박함을 교묘하게 엮어낸 일본 기업과 일본 정부가 주도한 ‘사기’ 사건이었으나, 한편으로 고종의 과욕과 아첨하는 측근들의 무능과 무지가 빚어낸 결과라서 더욱 서글퍼지는 대목이다.

기호일보, KIHOILBO

▶디지털 뉴스콘텐츠 이용규칙 보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