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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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쉴 수 없다
이재훈 겨레문화연구소 이사장/전 인천 남부교육청 교육장
  • 기호일보
  • 승인 2020.06.23
  • 1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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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겨레문화연구소 이사장
이재훈 겨레문화연구소 이사장

얼마 전 미국 백인 경찰의 가혹한 폭력에 희생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장례식이 휴스턴의 한 교회에서 유족과 많은 조문객이 참석한 가운데 TV와 인터넷으로 생중계됐고, 전 세계 시민들이 지켜봤다. 

AP통신은 ‘조지 플로이드는 전 세계에 변화의 힘을 일으킨 ‘빅(Big) 플로이드가 됐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현충일이라고 할 수 있는 메모리얼 데이에 백인 경찰관의 무릎에 목이 눌려 참혹하게 숨진 뒤로 정확히 보름 만이었다. 사건 현장을 지나던 사람이 찍어 공개한 동영상 속 플로이드 모습은 순식간에 미국 전역은 물론이고, 전 세계로 퍼져서 공분(公憤)을 샀다. 연일 보도되는 동영상에는 등 뒤로 수갑이 채워진 흑인 남성이 땅바닥에 얼굴을 짓눌린 채 ‘숨 쉴 수 없다’고 소리 지른다. 뉴스에 의하면 ‘엄마’를 부르짖기도 하고, ‘제발’이란 말을 거듭해서 외쳤지만, 그를 엎어놓고 목을 짓누르고 있는 백인 경찰관의 무릎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플로이드의 참혹한 죽음이 알려지면서 많은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정의 실현과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를 외치며, 경찰의 인종 차별성 폭력에 반대하는 동시다발적인 항의시위가 순식간에 미국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플로이드가 죽기 전 내뱉은 ‘숨 쉴 수 없다’라는 절규는 시위대의 구호가 되어 전 세계로 확산했다. 

영국의 한 신문은 이번 사건을 ‘인종주의는 팬데믹(전염병 대유행)’으로 규정했으며, 플로이드의 추모식 때에도 추도사에 ‘인종주의 팬데믹’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유명배우 조지 클루니는 흑인 차별을 가리켜 ‘흑인 차별은 우리 모두를 감염시켰고, 아직도 백신을 찾아내지 못한 팬데믹’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로 새삼 주목받은 ‘팬데믹’이란 말이 이렇게 쓰일 줄 누가 알았을까?

인종 차별성 폭력에 희생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장례식을 보면서 ‘갑질’이란 말을 생각했다. ‘항공기 땅콩 회항 사건’으로도 잘 알려진 갑질이라는 신조어(新造語)는 이미 유행어가 됐을 만큼 우리 사회에서 널리 쓰이는 말이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가 상대방에게 오만무례하게 대하거나 제멋대로 구는 짓을 갑질이라고 말하는 데, 일부 외신에서는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갑질이란 단어를 권력 과시(Power Trip)나 권력 남용(Overuse Power)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나 갑질의 의미가 정확히 전달되지 않아서인지 한글 발음 그대로 ‘GABJIL’로 표기하기도 한다. 이번 바다 건너 미국에서 백인 경찰의 가혹한 폭력에 희생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건 역시 부당한 공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미국판 갑질’ 사건이라고 봐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파트 경비원을 지속해 폭행하면서 괴롭혀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한 혐의를 받는 입주민이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졌다는 소식이다. 연일 협박과 폭행에 시달리던 경비원은 ‘입주민의 부당한 폭력과 협박에 참을 수 없다’는 음성 유언을 남기고, 안타깝게도 지난달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됐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그릇된 생각을 하는 자가, 항거하기 어려운 사람을 숨쉬기조차 어렵게 만들어 결국 목숨을 잃게 한 이 갑질 사건 역시, 가해자만 달랐을 뿐 미국의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과 본질이 전혀 다르지 않다. 

작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총인구의 4.9%가 다문화가정을 이루고 있으며, 인구 비율 5%가 넘기 시작할 것으로 예견되는 올해부터는 다문화사회로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차별 의식은 대체로 경제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매우 호감을 보이는 편이지만, 후진국이나 저개발 국가에서 온 근로자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외국인 근로자들과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이 겪는 차별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데다가, 피부색이나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인종차별적인 욕설을 듣거나, 소위 ‘왕따’를 당하는 등 피해를 겪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누구라도 경제적인 수준, 피부색, 언어, 성별, 출신지, 학력, 장애 여부 등에 따라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자유롭게 숨조차 쉴 수 없게 고통을 받아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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