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조 원에 이르는 추경안이 제대로 된 심의도 견제도 없이 3일 전광석화처럼 처리됐다. 상임위원장 독점 체제를 구축한 여당이 지난달 29일부터 닷새에 걸쳐 나 홀로 심사를 진행하더니, 결국 단독으로 추경안을 통과시켰다. 제1야당인 미래통합당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열외됐고, 정의당 의원들은 심사 과정에 문제가 있다며 기권표를 행사했다. 열린민주당에서도 반대표가 나왔다. 삼권분립의 보루이자,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 존립 가치가 처참하게 붕괴된 것이다. 이번 추경안은 절차와 과정뿐 아니라 목적과 내용 면에서도 문제가 많다.

추경의 목적은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상당 부분의 예산이 기존 정책 부작용을 해소하는 데 들어갔다. 9조1천억 원 규모의 고용안정 특별대책을 보면, 실제 실업자 수보다 30만 명이나 초과되는 일자리가 산정됐다. 대부분 단기 알바이고, 코로나19 이전부터 해왔던 것들이다. 효과나 사업 타당성도 불분명하다. 4조8천억 원이 편성된 한국판 뉴딜이 대표적 예다. 사업목적이 명확치 않고, 사업계획과 사전절차도 미흡하다는 평가다. 오죽하면 국회예산정책처까지 이번 추경안이 과도하고 불필요한 내용이 많다고 했겠나.

더 큰 문제는 재원조달이다. 이렇게 효과가 불확실한 대규모 예산이 통과되는데, 자구적 조치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번 추경으로 올 한 해에만 111조 원의 나라 빚이 늘어 (협의의) 국가채무비율이 43.5%까지 높아질 전망이다. 그런데도 여당 일각에선 벌써부터 4차 추경안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포퓰리즘 추경 및 적자재정’ 문제는 지금 야당에서 공론화하는 공수처 설립이나 정의연 사태 같은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심각한 일이다. 다음 세대에서 쓰여져야 할 돈이 아무런 통제장치 없이 화수분처럼 콸콸 새나가고 있는 것이다. 

재정준칙 법제화가 시급하다. 재정수지·정부지출·국가채무 등 재정지표에 대한 기준점을 확립하고, 이에 입각해 재정운용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코로나19든, 그보다 긴급한 어떤 재난이든 이처럼 어수룩하게 집행하는 건 명백한 국회의 직무 유기다. 재정준칙 도입으로 국가재정을 건전하게 관리하고, 적자재정 위험성을 감소시킬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다 집어치우고 이것부터 시작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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