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

세계화가 이뤄진 자본주의 경제에서 ‘성장’은 무조건 좋은 말이고 가장 힘이 센 말이다. 경제가 뒷걸음쳐도 ‘감소’가 아니라 ‘역성장’이라 부른다. 성장은 풍요를 약속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빈곤과 불평등이 확대되고 자연 생태계는 크게 훼손돼 여러 방면에서 문제를 야기한다. 결과적으로 성장은 소수의 풍요와 번영을 가져왔을 뿐이다. 최근 홍콩에 대한 중국의 국가보안법 강행으로 미국이 홍콩의 특별지위 박탈과 서유럽 강국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국제금융가에서 벌써 홍콩 자본의 차기 행선지를 두고 관심이 높아졌다. 

몇몇 국가는 대놓고 자신들이 홍콩의 대체지로 적합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려 경쟁적으로 나섰다. 일본만 해도 아베 정권은 자민당의 경제성장전략본부의 성명으로 ‘아시아의 지정학적 상황을 기반으로 금융 도시 도쿄를 실현한다’는 내용으로 건의사항을 내놓았다. 건의문에는 해외 인재들의 비자 면제, 사무실 무상 제공 등 국제금융중심지로서의 역할을 가득 담았다. 홍콩 대체지로서 관심을 끌기 위한 전략이 분명했다. 싱가포르는 한 수 더 떴다. 홍콩의 자본과 인력은 물론 글로벌 금융시장을 대상으로 가변자본회사(VCC) 허용이라는 충격적인 조처를 내놓았다. 이 조처는 악명 높은 조세피난처 버금가는 파격적인 특혜로 해외 부동산이나 헤지펀드들에게는 몹시 입맛 당기게 하는 것으로 반응이 꽤 있다는 언론 보도다. 

아시아 특급 금융센터를 둘러싼 경쟁은 물밑에서 격화되고 있는데 자국의 높은 세율이나 영어 사용 금융 인력의 부족, 각종 면허 규제, 외국인에 대한 편견 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특별한 조처를 통해 적격자라고 내세우는 웃지못할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파이낸셜타임스(FT)’는 ‘아시아 특급 금융센터를 둘러싼 경쟁’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몇 가지 조건을 성공적인 항목으로 내세우면서 부적격 사유를 적시했을까. 사설에서는 풍부한 달러 보유고는 기본이고 태환의 편리성, 낮은 세금, 인적·물적 금융 인프라를 지적하며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법의 지배에 대한 신뢰’, ‘표현의 자유’, ‘외국인에 대한 편견 없는 사회 분위기’를 특별히 강조했다. 

따라서 각국은 여러모로 싱가포르의 적수가 못된다고 했다. 그렇다고 싱가포르가 적임이라는 주장도 아니었다. 물론 높은 점수를 받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우리도 얼마전 홍콩의 자본 유치에 관심을 보였다가 각국의 경쟁에 놀라선지 유치 활동을 조용히 접었다는 후문이다. 

‘니벨룽의 반지’는 오페라 역사상 위대한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라인강 깊숙이 묻힌 황금을 세 요정이 지키고 있었는데 이 황금으로 된 반지를 소유하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난쟁이가 몰래 훔쳐 만든 게 바로 니벨룽의 반지였다. 문제는 이 반지에는 저주가 담겨 있어 반지를 끼는 자에게 엄청난 비극이 닥친다는 것. 실제로 치열한 반지 쟁탈전에서 난쟁이를 포함한 그 누구도 파멸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반지를 끼는 순간 욕망의 노예가 되면서 전혀 딴 사람으로 변했고 반지는 소유자의 주인이 돼 되레 맘껏 조롱했다. 반지를 빼면 저주에서 풀려 정상적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한번 권력의 단맛을 본 자들은 결코 반지를 빼려하지 않았다.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이 그토록 괴로워하면서도 반지에 집착한 것처럼. 미국의 레이건, 영국의 대처가 집권해 전 세계가 신자유주의를 향해 달려갈 때부터 ‘성장’의 신화는 강력해졌고 되돌릴 수 없는 대세가 됐다. 성장 만능의 시대가 화려하게(?) 꽃피기 시작한 것이다. 그 시절 북유럽 스웨덴에서는 의회민주주의 국가도 헌법을 개정하고, 고용보장 확대, 실업급여와 병가수당 확대, 노동연금 수급자격 확대, 복지단위를 가족에서 개인으로 수정, 유급 부모휴가제 도입, 대학등록금 폐지, 공공의료 강화 등을 통해 성장이 아닌 배분의 성과를 이뤄냈다. 홍콩의 대체지에서 수많은 조건보다 ‘법의 지배에 대한 신뢰’와 ‘표현의 자유’를 지적한 ‘FT’의 특별한 주장에 대해 수긍이 가는 건 스웨덴의 개혁만이 아니라 ‘성장’만 되뇌며 무리하다가는 니벨룽의 반지 주인 짝이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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