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조선후기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의 대표 실학자다.

 그는 모든 것을 공정하게 보고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공관병수(公觀倂受)의 실학적 학문자세를 중시했다. 특히 새로운 학문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실(實)’에 대한 탐구 욕구가 강했다.

 1765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중국 베이징에 도착하자 곧바로 서양인 선교사 할베르스타인(August von Hallerstein)과 고게이즐(Anton Gogeisl)을 남천주당으로 찾아가 만났으며, 그들과 천주교나 천문학 등 서양 문물에 관해 토론하고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찰하기도 했다.

 서양 신부들을 만나 서양 천문학과 천체 의기에 대한 토론 등 중국 여행 과정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기술한 「을병연행록」(한글본)·「연기」(한문본), 수학서인 「주해수용」, 천체관측기 제원과 제작법을 기록한 「농수각의기지」, 독창적인 국가 개혁안을 제시한 「임하경륜」 등이 결과물이다.

1.홍대용의 개혁적 경세론이 담긴 ‘임하경륜’. <천안박물관 제공>2.홍대용 증직교지.  <홍대용 종손가 소장>3.홍대용의 ‘계방일기’. 홍대용은 1774년(영조 50)에 세손인 세자익위사로 정조에게 토론을 통해 학문을 가르쳤다.<천안박물관 제공>
1.홍대용의 개혁적 경세론이 담긴 ‘임하경륜’. <천안박물관 제공>2.홍대용 증직교지. <홍대용 종손가 소장>3.홍대용의 ‘계방일기’. 홍대용은 1774년(영조 50)에 세손인 세자익위사로 정조에게 토론을 통해 학문을 가르쳤다.<천안박물관 제공>

# 석실서원에서 학문의 길 열다

 남양주시 다산2동에 유지가 남아 있는 석실서원(石室書院)은 홍대용이 공부한 곳으로, 이곳에서 호남 황윤석(黃胤錫)과도 만났다. 

 홍대용은 12세에 진정한 학문에 뜻을 두고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석실서원에서 학문을 배웠다. 

 석실서원은 조선후기 진경(眞景) 문화를 꽃피우고 북학사상(北學思想) 태동에 영향을 끼치는 등 조선후기 혁신적인 문화의 산실이자 이념 공간이었다. 김창협(학술), 홍세태(중인), 정선·조세걸(예술), 이병연·김창흡(문학), 홍대용·황윤석(실학) 등이 배출됐다.

 석실서원은 엄격한 생활규범과 학습규칙에 의해 운영된 매우 흥미로운 방식의 교육기관이기도 하다. 서원 내에서는 담배와 차 마시기는 금기였고, 코 푸는 일부터 붓으로 장난하거나 낙서도 금지됐다. 서원 밖에서는 관원에 대한 장단점이나 관리 임용 등에 대한 논평은 물론 권세가에게 아부하는 말과 재산의 많고 적음, 외설스러운 것, 여자의 미모나 타인에게 청탁하는 일 등도 금기였다.

 원생은 새벽 4시께 일어나 엄격한 행동수칙에 따라 책을 읽고 반복해서 토론했고, 그 성과는 매번 책으로 엮어 배포했다.

 석실서원은 공허한 학문을 비판하고 실용적 학문을 강조한 학풍을 유지했고, 권력이나 현실정치와 연결되는 지점을 차단하고 스승과 제자, 원생들 상호 간 토론을 중심으로 격의 없이 학문에 열중했다.

 

 # 스승과 격쟁적인 토론을 하다

 홍대용은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 인간과 동물의 성품은 같다)’을 주장한 스승 김원행과 다양한 학문 분야에 걸쳐 격렬한 논쟁을 통해 학문의 폭을 넓히고 다양한 관점을 수용할 수 있었다. 

 김원행은 제자 홍대용과 한자리에 마주 앉아 강학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책을 읽고 매번 기록해 두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또 홍대용에게 진실한 마음(實心·실심)과 실천성을 학자의 자세로 주문했다(김원행, 「답홍대용(答洪大容)」 참조). 학자는 실심(實心)이 없는 것을 근심해야 하며, 실심이 선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 이를 통해 옳고 그름과 잘잘못을 따지고 위선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라고 강조했다(김원행, 「답홍대용 3」 참조)

 홍대용은 스승의 가르침을 이어 자기 시대의 실체를 찾고 위선을 걷어내고자 노력했다. 또 세계의 진실(實)은 무엇인지 거짓(虛)은 무엇인지 고민했다. 전통적인 우주관과 세계관에 의문을 제기하고 선입견과 위선적 행위를 배격하기에 이르렀다.

석실서원의 학문 자세를 고취시켰던 ‘취석’.
석실서원의 학문 자세를 고취시켰던 ‘취석’.

 

 # 실심(實心)과 실학(實學)에 뜻을 두다

 당시 조선인 대부분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전통적인 우주관적 사고에 갇혀 있었다. 

 홍대용은 해가 지는 모습, 달과 해가 경도와 위도가 같아져 일직선상에 놓일 때 생기는 일식 과정의 변화를 통해 지구설과 지구 자전설을 주장했다. 조선 유학자들의 고식적인 우주관을 비판한 것이다. 이런 주장은 당시 양반사회의 고착된 사대주의를 비판하고 자국의 자주적 문명을 긍정하는 태도로 발전한다.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은 발전된 문명과 문화를 자랑하는 청나라를 오랑캐라 부르며 배척했을 뿐만 아니라, 지배층은 조선의 현실에서 불가능한 북벌론을 오래도록 주장했다.

 홍대용은 그들의 속내를 간파해 냈다. 조선의 지배층이 국제 정세와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위선에 빠져 있으면서 겉으로는 바른 학문에 뜻을 두고, 잘못된 학설을 배격하고, 세상을 구제한다는 주장을 한다고 여겼다. 

 홍대용은 저들의 주장 이면에는 ‘자랑하려는 마음(矜心)’, ‘이기려는 마음(勝心)’, ‘권력을 가지려는 마음(權心)’, ‘이익만 노리는 마음(利心)’을 숨기려는 기만이 있다고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정신과 힘을 다해 실심(實心)을 찾고 ‘실학(實學)’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생명 존중과 ‘균등론’의 실학을 이루다

석실서원묘정비. 석실서원은 흔적을 찾기 어렵고 연혁을 보여주는 비석이 남아 전한다.
석실서원묘정비. 석실서원은 흔적을 찾기 어렵고 연혁을 보여주는 비석이 남아 전한다.

 홍대용은 ‘양반들은 아무리 심한 굶주림에도 팔짱 끼고 편하게 앉아 농사짓지 않는다’(홍대용, 「임하경륜」 참조)라며 노동하지 않는 양반사회를 힐난했다. 심지어 노동하지 않고 놀고먹는 양반에게 형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재능과 학식이 있다면 농부나 장사치의 자식도 의정부에 들어갈 수 있다(홍대용, 「임하경륜」 참조)고 해 신분제 사회인 조선의 금기를 깨뜨렸다. 

 홍대용의 신분제 철폐 주장은 인간에 대한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람과 동식물을 비길 때 사람의 입장에선 사람이 귀하고 사물의 입장에선 사물이 귀하다고 하겠지만 하늘의 입장에서 사람과 사물이 균등하다(홍대용, 「의산문답」 참조)고 정의했다. 서로의 입장에서 상대를 이해하기보다 절대적인 하늘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생명체가 ‘균등’하다는 놀라운 주장이었다. 

 이러한 그의 생명존중 사상은 전통적 세계관과 신분제 관념을 허물어 버리는 ‘균민론(均民論)’으로 발전했다.

 홍대용은 문명과 문화를 가진 나라, 자기의 역사를 기록하는 나라는 모두 같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양의 지구본과 중국의 지구본에서는 저마다 자국을 중심에 두고 그렸지만 사실 어느 나라나 지구의 중심이 된다는 논리로 조선의 문명적·독창적 가치를 중시했다.

 그만큼 홍대용의 실학은 생명존중과 우리 나라의 미래 방향성에 영감을 준다. 인간의 욕망에 따라 환경 파괴와 생명 경시에까지 이른 개발사회에 대해,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의 대립과 국제적 긴장 관계 속에서 우리나라의 방향성을 찾고자 할 때 일깨움이 많다.  

남양주=조한재 기자 chj@kihoilbo.co.kr 

 자료 및 사진 제공 ; 남양주시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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