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으로 삶이 무너져 내린 작가 ‘파예’는 글쓰기 강의를 하러 아테네로 떠난다. 작품은 특별한 사건 없이 파예가 만나는 인물들과 대화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파예의 주변 인물들은 대부분 최소 한 번의 이혼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똑같이 이혼을 경험했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지니고 살아간다.

파예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비행기에서 만난 옆자리 남자다. 그는 몇 년 전 남편과 이혼했다고 말하는 파예에게 자신의 결혼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첫 번째 결혼은 삶에서 가장 행복하고 조화로운 시절이었지만 한 번의 말다툼으로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남자는 아주 우아한 미인이었지만 책을 멀리하고 사치품을 중요하게 생각한 두 번째 아내와도 이혼했다.

파예는 객관성이 결여된 비행기 옆자리 남자의 이야기에 의구심을 품고 아테네에서 다시 그와 만나게 된다. 남자는 두 번째 아내와는 달리 순수하고 단순하며 근검절약이 몸에 밴 세 번째 아내와의 결혼생활에 대해 이야기한다. 원리원칙에 기반을 둔 두 사람의 가정은 평온했지만 남자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이혼을 결심한다.

파예는 남자의 이야기를 듣다가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그의 외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혼 후 아픔을 겪고 있는 파예와 세 번의 이혼을 경험한 후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 남자는 지금도 여전히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파예는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경험을 되새기며 자신의 윤곽을 서서히 그려 나가기 시작한다.

소설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앤과의 대화를 통해서는 파예의 모습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앤은 이혼과 괴한의 습격을 당한 후 송두리째 흔들리는 삶을 경험한 여성이다. 파예는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감당해야 하는 고통을 겪고 있으며, 그 경험은 이미 많은 여성이 겪고 있는 문제다. 파예는 아주 수동적이고 취약해 보이지만 「윤곽」 3부작이 진행되는 동안 무한한 가능성과 변화를 보여 준다.

저자 레이첼 커스크는 이 작품에서 화자를 거의 드러내지 않고 상대의 독백에 가까운 이야기와 화자의 기억이 콜라주 기법처럼 서로 얽혀 작품의 전체 줄거리를 형성하는 방식을 택한다. 상대의 독백은 기존 이야기의 중심과 대조를 이루며 감춰져 있던 주인공의 윤곽을 서서히 드러낸다.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에 고립된 현대 여성들의 초상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침묵과 고요함, 수동성, 타인에 대한 관찰만으로도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점에서 「윤곽」은 여성들의 내밀한 전투를 담은 서사이기도 하다. 이혼으로 인해 상실을 겪은 화자에게 듣는 행위는 파편처럼 부서진 삶 속에서 뒤틀리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희망이다. 홍봄 기자 spring@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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