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연 인천문인협회 회장
김사연 인천문인협회 회장

류인복은 「인천문단」 신인상(1994년), 「수필문학」(1995년), 「문학세계」(1997년) 신인상을 통해 문단에 발을 디딘 수필가이며 한국서예협회 인천지회 이사를 맡고 있는 실력 있는 서예가이다. 그는 연천군 노곡리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땅거미가 질 무렵이면 모락모락 피어오른 저녁 연기가 하늘을 맴돌다가 사라지는 민통선 근처의 작은 마을이다. 한때 땅굴 발견으로 전국을 놀라게 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작가는 고향의 추억을 더듬어 첫 수필집 「민통선의 전설」을 출간했다. 

이 책은 어릴 적 고향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 젊은 시절의 초상, 결혼과 가정생활, 힘겨웠던 직장생활과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애정과 감사함을 담았다. 그중에 민통선에 관한 작가의 소회를 들춰 본다. 노곡리 마을은 평화로움이 언뜻 보기에는 여느 농촌과 다를 바가 없지만, 잠시 머물다 보면 온 하늘에 살벌한 전파가 흐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북쪽 인민군 초소에서 고성능 확성기로 내보내는 대남 방송 때문이다. 광적이면서도 경직된 어투의 북한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조용해야 할 전원 마을의 정적을 시도 때도 없이 깨트려 버렸다. 그 소리는 군사분계선 저편에서 보내는 소리였지만 가까운 이웃에서 보내는 소리처럼 늘 크게 왕왕거렸다. 

어릴 때는 대남 방송의 의도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차츰 자라면서 그것이 선량한 국민의 마음을 교란시키려는 선전이었고, 전쟁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공포감을 느끼게 됐다. 도회지의 자동차 소음 공해는 아무런 의미도 리듬도 없는 파열음뿐인데 대남방송엔 섬찟한 내용과 억양이 소름을 돋우었다. 그러나 어느 한 집도 그 소리가 무서워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피곤한 일과를 마친 농촌 주민들은 저녁을 먹자마자 편한 잠자리에 들고 싶었지만 늦은 밤까지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듣기 싫다고 끌 수 없는 대남 방송 때문이었다. 그 소리는 만물이 잠드는 고요한 밤이 깊을수록 더욱 커졌다. 당시 시계 없는 집이 많았던 시절, 대남 방송은 시계 역할을 할 정도로 주민 생활에 리듬을 맞춰가며 흘러나왔다. "동무들, 오늘은 우리의 고유 명절인 추석입메다. 쇠고깃국에 쌀밥을 지어먹고, 모두가 일손을 놓고 금강산 구경 가는 날이라요. 동무들도 함께 가시자요."

대남 방송의 여자 아나운서 목소리는 어찌나 독하고 앙칼졌는지, 흡사 다친 상처에 고추장이라도 처바른듯 미쳐 날뛰는 것 같았다. 작가는 어머니 몰래 군인들에게 고추장을 퍼주고  건빵을 얻어먹었는데 그때마다 "우리 집 고추장독이 다 비워지는 한이 있더라도 저 맵디맵게 날뛰는 공산당이나 막아주십쇼!"하고 속으로 빌었다. 그 동네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서 맨 처음 땅굴이 발견됐다. 이따금 땅 밑에서 폭음이 들리고 땅이 울린다는 주민들의 의견과 월남한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군부대에서 진상 조사에 들어갔다. 

남방한계선 부근 여러 군데를 시추하던 어느 날, 한 시추공에서 연기가 솟아올랐고 계속 파 들어갔더니 천인공노할 대남 땅굴이 발견된 것이다. 1990년대 초, 작가가 고향을 찾았을 때 까다로운 검문검색으로 통행하기 힘들었던 임진강 다리 검문소는 형식적인 검문으로 쉽게 통행이 됐다. 민통선 안에까지 들어가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적색 모자와 흰색 상의를 착용하지 않아도 됐다. 놀라운 것은 공포와 긴장감을 감돌게 했던 대남 방송도 그 횟수가 줄어들고 내용과 억양도 많이 순화된 변화였다.

민통선 마을엔 오랜 세월 동안 인적이 닿지 않는 곳이 많아 희귀한 야생 동식물이 원시 상태로 보존돼 손가락보다 더 굵은 고사리, 진귀한 산나물, 팔뚝 만한 더덕이나 값비싼 송이버섯 등이 무진장 많았다. 규제가 완화되면서 산나물에 구미가 당긴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면서 지뢰 사고가 많이 발생했다. 주민들은 지뢰밭을 익히 알고 있지만, 외지인들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휴전선 155마일의 철조망은 베를린 장벽의 벽돌 조각처럼 한 조각 기념품으로 남고, 저승사자의 부름 소리와도 같았던 대남 방송은 민통선 부근 마을에서 살던 모든 이들의 귓가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이명으로 남아 새로운 전설을 만들 날을 기대한다고 염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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