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2월,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는 ‘밀레니엄 버그’ 공포에 휩싸였다. 컴퓨터가 연도의 끝 두 자리만 인식하기 때문에 2000년과 1900년을 구분하지 못해 일대 혼란에 빠질 거라는 예측이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시스템 오류로 핵미사일이 발사될 수도 있다는 끔찍한 보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런 우려를 사전에 잘 대처한 결과 21세기는 별 탈 없이 시작됐다. 

이처럼 세기말에는 새 시대를 여는 기대와 함께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공존한다. 1899년에서 1900년으로 넘어가던 120년 전 유럽 사회도 그랬다. 과학기술의 발달, 산업사회로의 이행, 자본주의의 확산 등으로 새 시대가 열린 반면 기존의 가치관과 질서는 크게 흔들렸다. 게다가 뒤이어 발발한 1차 세계대전으로 혼란에 빠졌다. 특히 바이마르공화국은 패전에 따른 상실감으로 어둡고 우울한 정서가 팽배했다. 이런 분위기를 예술로 승화한 것이 독일 표현주의 사조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는 1차 대전 이후인 1920년부터 대략 10년간 독일 문화권에서 유행한 영화 사조로, 이는 인간 내면의 불안을 어둡고 극단적인 이미지로 포착했다. 영화 ‘노스페라투(1922)’는 독일 표현주의 사조의 대표작이자 흡혈귀 캐릭터가 등장한 최초의 영화다.

‘병을 옮기는 자’라는 뜻의 ‘노스페라투’는 브람 스토커의 고딕소설 「드라큘라」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그러나 저작권자의 허락을 얻지 못해 제목과 몇몇 설정을 바꿔 제작한다. 우선 기이한 사건의 무대는 런던이 아닌 독일의 작은 마을로 변경됐다. 주인공 또한 치명적인 매력의 드라큘라 백작이 아닌 음습한 곳에 숨어 사는 쥐를 닮은, 병약한 느낌의 오를로크 백작으로 수정됐다. 그러나 큰 줄거리는 여전히 유사하기 때문에 이는 저작권 분쟁의 불씨가 된다.

부동산 중개업자인 후터는 고성에 사는 오를로크 백작이 새 집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성으로 향한다. 소문대로 섬뜩한 인상의 오를로크 백작은 계약서를 살펴보던 중 후터의 아내인 엘렌의 사진에 관심을 보인다. 백작이 흡혈귀임을 눈치챈 후터는 곧 성에 갇히고, 그 사이 백작은 엘렌이 사는 마을로 향한다. 쥐를 몰고 다닌 까닭에 그가 나타나는 곳마다 페스트가 창궐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다. 뒤늦게 돌아온 남편을 통해 엘렌은 흡혈귀의 존재를 알게 되고, 이 비극을 끝낼 방법은 자신의 희생이라 판단한다. 그녀는 창문을 열어 흡혈귀를 맞이하고, 엘렌의 피를 정신없이 빨던 오를로크 백작은 새벽 닭이 우는 소리를 듣지 못해 태양 빛에 사라진다.  

일부 내용을 수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소설 「드라큘라」를 차용했다는 법원의 판단으로 당시 이 작품은 저작권 침해라는 오명을 얻게 된다. 그러나 오를로크 백작의 흡혈 행위를 쥐와 페스트로 암시한 부분이나 조명의 효과적인 활용으로 형상을 과장·왜곡해 처리한 방식은 이 영화가 표현한 불길함의 상징적 시각화의 정수라 하겠다. 스산하고 기괴한 분위로 압도하는 영화인 만큼 이후 할리우드에 이식돼 높은 수준의 공포영화 장르 형성에 이바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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