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서사는 주로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을 다룬다. 밥 먹고, 일하고, 동료와 술 한 잔 기울이고, 집에 돌아와 목욕하고, 잠자는 일상의 반복은 우리 삶과 같기 때문에 굳이 영화로 만들 필요가 없어 보인다. 설령 그런 영화가 있다 하더라도 볼만한 재미가 있을지 의문마저 든다. 그러나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일상을 영화로 포착한 감독이 있다. 취업, 결혼, 부모를 모시는 일을 소재로 평이하게 펼쳐지는 특별할 것 없는 홈 드라마를 통해 삶의 진리를 포착해 내는 비범한 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세계다. ‘가을 햇살’(1959)은 오즈 감독의 후기 작품으로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특유의 인생관을 잘 보여 준다.

미망인 아키코의 딸이 혼기가 찼다며 남편의 세 친구들은 중매를 자처한다. 고맙게 생각하는 어머니와 달리 딸 아야코는 심드렁하다. 결혼 생각이 없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은 혼자 남겨질 엄마 걱정에 딸은 시집 갈 생각을 접어두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아버지의 친구들은 아야코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 미망인의 재혼 계획도 함께 추진한다. 어머니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사천리로 진행 중인 재혼 소식이 아야코 귀에 먼저 들어가고, 딸은 어머니에게 배신감을 느낀다. 반면 엄마는 딸이 자신에게 연애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이 못내 섭섭하다. 

작은 갈등은 있었지만 모녀 사이의 오해는 풀리고 두 사람은 여행을 떠난다. 엄마는 딸에게 걱정 말고 시집 가서 행복하게 살라는 뜻을 전하고, 딸은 복잡한 심경에 눈물이 흐른다. 여행 마지막 날, 모녀는 가을 산이 아름다운 풍경을 앞에 두고 단팥죽을 먹는다. 아키코는 여행지에서 딸과 먹은 단팥죽을 잊지 못할 거라며 웃음을 지어 보인다. 출가 후 홀로 남겨진 집엔 유달리 시계 소리가 크게 들린다. 넓지 않은 집이었건만, 딸이 떠난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아키코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홀로 남은 집에 고요히 앉아 있다. 

1949년작 ‘늦봄’에서는 홀로 남겨질 아버지 걱정에 결혼을 주저하는 딸이 나온다면 ‘가을 햇살’에서는 어머니 걱정에 시집을 늦추는 딸이 등장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늦봄’에서 결혼하지 않으려 했던 딸 역할의 배우 하라 세츠코가 ‘가을 햇살’에서는 딸을 시집 보내려는 어머니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달라진 배역에서 세월이 느껴진다. 

이처럼 오즈의 영화는 거스를 수 없는 이치를 관조한다.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평범한 일상을 통해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담아내는 한편, 부모 세대와의 이별 또한 자연스러운 것임을 보여 준다. 홀로 외롭고 쓸쓸하게 남겨지더라도 저무는 삶을 살아가는 일 또한 피할 수 없는 순리임을 조용하고 단정한 영상미로 담아낸다. 

싱그러운 봄이 가면 뜨거운 여름이 오고, 노랑·빨강 영롱한 빛으로 물들었던 가을이 지면 고독하고 추운 겨울을 피할 수 없듯이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사소한 일상으로 순환적 진리를 탁월하게 빚어낸 시대의 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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