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서리로 변한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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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서리로 변한 천사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 기호일보
  • 승인 2020.11.06
  • 1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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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진실한 사랑일수록 때로는 엄합니다. 그래서 오해도 생기도 갈등도 생깁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고, 그때 비로소 미안함과 감사함의 눈물을 흘립니다. 

「바보 되어주기(안순혜)」에 아빠에게 꾸중을 듣던 고교생 아들이 가출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않겠다며 이곳저곳 하염없이 걸었지만, 딱히 갈 곳이 없어서 집 근처 놀이터 벤치에 벌렁 누웠습니다. 눈 안으로 별들이 가득 들어오자 스르르 잠이 왔습니다. 

한참 후에 눈을 뜨고 나서야 자신이 아빠의 허벅지 위에서 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겨울 추위를 잊은 채 잘 수 있었던 것은 아빠의 옷 때문이었습니다. 밤새 벤치에 앉아 잠든 아들을 지킨 아빠였습니다. 자신은 눈을 떴지만, 아빠는 앉은 채 졸고 계셨습니다. 서리 맞은 아빠의 머리가 더 하얗게 보입니다. 그 순간 굵은 눈물방울들이 주르륵 흘러내립니다.

잠시 제가 고교생 아들이라고 상상해봅니다. 공부하기는 싫고 PC방에서 게임만 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빠는 공부해야 한다면서 늘 화를 냅니다. 싫었습니다. 집에만 오면 숨이 막힐 것만 같습니다. 그래도 참았습니다. 아빠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그날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습니다. "다시는 집에 들어오나 봐라."

집 밖으로 뛰쳐 나왔습니다. 춥고 깜깜한 거리를 헤매면서 "이렇게까지 했으니 이제는 나를 함부로 대하진 못할 거야"라는 생각이 들자 통쾌했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을 헤맸지만 딱히 갈 곳이 없습니다. 뉴스에서 본 집단구타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고, 어느 학생이 길거리에서 만난 아저씨들의 꼬임에 넘어가 조폭이 돼 삶이 망가지는 방송도 떠오릅니다. 이 밤이 너무도 무섭습니다. 그렇다고 집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망설이던 끝에 집 근처 놀이터 벤치에 드러누워 밤하늘의 별을 보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추웠습니다.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아빠의 허벅지에 내 머리가 얹혀 있고, 내 배는 아빠의 옷으로 덮여 있습니다. 아빠는 셔츠차림으로 머리를 떨군 채 졸고 있습니다. 아빠의 머리 위는 새하얀 서리가 내려앉아 있습니다.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이때의 눈물은 감격입니다. 여태껏 아빠에 대한 나쁜 감정이 자신의 편견이었음을 깨달았고, 나에게 그렇게도 엄격하셨던 것도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진실한 사랑은 한참을 아픈 뒤에야 비로소 얼굴을 드러내나 봅니다.

이번엔 제가 아빠라고 상상해봅니다. 고교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렇게도 공부가 싫었습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거듭될수록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마치 지옥문을 들어서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서야 알았습니다. ‘그때 공부를 열심히 했더라면’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아들만큼은 학업에 충실하길 바랐습니다. 저 같은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되니까요. 공부가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공부를 잘해야 선택의 문이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녀석이 문을 박차고 나가버리네요. 속이 상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습니다. 12시가 넘었는데도 녀석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분노도 잠시 이제는 걱정이 앞섭니다. TV에서 본 끔찍한 상황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웁니다. "내가 너무 심했나?"

두툼한 겉옷을 챙겨 입고 나갔습니다. 어디를 가도 보이지 않습니다. 걱정이 불안감으로 바뀝니다.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그러던 끝에 놀이터 벤치에서 새우잠을 자는 녀석을 보았습니다. 눈물이 쏟아집니다. 미안함이 앞섭니다. 머리 좋은 아빠를 만났으면 저 녀석이 저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될 텐데…. 조용히 겉옷을 벗어 녀석의 배를 덮어줍니다. 녀석의 머리를 들어 허벅지 위에 얹어놓습니다. 눈물이 납니다. 그리고 잠듭니다. 그렇게 새벽이 됩니다.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있던 서리가 천사가 돼 내려와 아빠의 머리 위에 살며시 앉아 따뜻한 이불이 되어줍니다. 잠시 후면 아빠와 아들이 서로를 껴안으며 "사랑해!", "미안해!"를 외치는 아름다운 장면을 이렇게 새벽 서리가 준비하고 있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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