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흥구 인천광역시문인협회 이사
황흥구 인천광역시문인협회 이사

아침에 집을 나서려는데 아내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한 손은 허리춤에 얹고 오리걸음으로 걸어 나와 현관문 앞에 버텨서고 있기에 공연히 심사가 뒤틀려 한마디 내뱉고 나온 것이 하루 종일 마음이 찝찝하다.

"내가 뭐라고 했어. 올해부터는 마른 고추를 사든가 아예 고춧가루를 사다 먹자고 했잖아. 고생을 사서 한다니까…."

"고춧가루는 나만 먹자고 이러는 줄 아나 보지. 마른 고추 사다가 빻아서 먹으면 나도 편한 줄 안다고요."

아마도 어제 오후 늦게 아내가 잠깐 집을 비운 사이 아파트 후미진 공터에 널어놓은 고추에 여우비를 맞힌 모양이다. 부랴부랴 걷어서는 비 맞힌 것이 안달이 났던지 다시 말리려고 안방에 화장대까지 밀쳐내고 네댓 상자나 되는 젖은 고추를 혼자 옮기느라 그만 몸살에다 허리 병까지 도져 버린 것이다. 

오늘은 모처럼 집에서 쉬려고 했으나 안방으로 거실 바닥에 온통 고추 말리는 것 때문에 제대로 다닐 수가 있나, 매운 내로 도대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 수시로 뜨거운 방바닥에 넌 고추를 뒤집어 놓으라고 하질 않나, 시간 되면 고추 위로 선풍기를 틀라고 하지를 않나, 꼼짝없이 아내가 시키는 대로 하루 종일 고추에 온갖 치성을 다 드린 하루였다.

미운 것도 자주 보면 정 든다고 했던가. 어제만 같아서도 꼴도 보기 싫던 것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제법 보송보송하게 말라 며칠만 햇볕에 잘 말리면 이 고생은 면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눈 뜨기 무섭게 일기예보를 확인해 보니 태풍의 영향권으로 비가 오락가락할 것이라는 아리송한 예보는 사람을 더욱 헷갈리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동녘 검은 구름 위로 쪽빛 하늘을 살며시 제치고 희뿌연 햇살을 드리우는 것이 여간 반갑지가 않다.

미심쩍어하는 아내를 채근해 방 안에 있는 고추를 상자에 담아 아파트 시멘트 바닥에 다시 옮겨놨지만 하루 내내 날씨가 감질나게 만들고 있다.

사실은 지난해에도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아내는 무척 고생했다. 한 번 그렇게 당하고부터는 내년에는 세상없어도 마른 고추 사다 빻아 먹겠다던 아내의 결심이 올해도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얼마 전 추석이 지나고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는 이웃에게서 시골 친정에서 키운 청정 고추를 서로 아는 사이에 싸게 주겠다는 소리에 솔깃해 20㎏들이 생고추 네 상자를 사고 만 것이다. 지난해의 굳은 결심은 어디 가고 말린 고추 사다 빻은 것보다야 믿을 수 있어 좋고, 싼값에 구할 수 있어 좋다며 득의양양해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계산상으로는 이득이 있을 줄 모르나 손해 보는 장사임은 틀림없다. 몇 날을 두고 아파트를 올라다니는 발품하며 올해 같은 경우 잦은 비 때문에 안방에다 말리려면 도시가스 비용에다 선풍기 돌리는 데 전기요금은 얼마인가. 그리고 무거운 고추 상자를 들어 올리다 허리 삐끗해 파스값까지 합치면 얼마인데 무얼 보고 이득이라 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아내의 이런 딱한 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났다. 살아생전 어머니는 고향 집 텃밭에다 부친 고추를 발갛게 약이 오르면 따다가 마당 한가운데 멍석을 깔고 늦여름부터 말리기 시작했다. 해 질 녘까지 멍석 끝에 쪼그리고 앉아 두 손으로 골고루 펼쳐 놓으시던 모습이 애잔하다.  

어느새 아내도 어머니가 그랬듯이 수건 대신 차양이 긴 모자를 눌러쓰고 널어놓은 고추를 고르게 펼치는 모습이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었다.

내년부터는 세상없어도 마른 고추 사다 빻아 먹겠다고 벼르고는 있지만 아마도 그렇게 쉽게 될 성싶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말려도 아내만이 계산하는 이득이 따로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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