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강옥엽 인천여성사연구소 대표

그동안 우리 역사에서 여성에 대한 연구는 각 시대에 걸쳐 여성의 사회·경제·정치적 지위, 가족제도 변화, 여성의 재산 상속권에 관한 연구와 특수직 여성으로 분류되는 기녀·의녀·궁녀·무녀 등 생활상의 연구에서 일정한 성과가 있었다. 

그럼에도 사료의 한계나 연구 방법론 모색 등의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기왕의 연구를 통해 우리 여성의 각 시대별 역할을 살펴보면, 한국 고대사회에서 여성은 지모신(地母神), 신모(神母), 다산(多産) 등 생산의 상징, 자녀의 출산과 양육, 생활의 기본이 되는 의식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신라에서 여왕이 존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성의 가계상속권과 더불어 재산상속권도 인정하는 사회적 관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소서노나 신라의 선덕, 진덕, 진성여왕 등장은 이러한 사실을 대변해주고 있다. 고려시대까지 여성은 재산상속권, 가계상속권, 제사상속권 등에 있어서 남성과 별다른 차별을 받지 않았다. 고려에서는 아들이 없어도 딸이나 사위, 외손이 제사를 지낼 수 있었고, 이에 대를 잇기 위해 양자를 들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 특히, 결혼제도에서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은 여성의 입지를 한결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이와 관련된 사례를 보면, 장인의 부고(訃告)를 접한 백운 이규보가 "지금은 남자가 장가들면 여자 집에 가서 거주해 남자가 필요로 하는 것은 모두 처가에서 해결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장인과 장모의 은혜가 부모의 은혜와 똑같게 되었습니다. 아아, 공께서 저를 두루 보살펴 주셨는데 세상을 버리고 운명하셨으니 저는 장차 누구에게 의존하리까!" 하고 애사(哀辭)를 남겼던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또, 「고려사」열전에 대부경 박유가 당시 원나라 공녀로 가야만 하는 고려 여성들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대저 사람이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은 장차 그 자식이 부모를 봉양할 것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려의 풍속은 차라리 남자로 하여금 따로 살게 할지언정 딸은 내어 보내지 않음이 진나라의 췌서(贅서)와 비슷한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품안에서 빼앗아 4천 리 밖으로 보내게 되어 발이 한번 문을 나서면 종신토록 돌아오지 못하니 그 정(情)에 어떠하겠습니까" 라고 말했던 것에서도 여성의 역할을 추측할 수 있다. 

심지어 사별한 아내에 대한 남편의 애틋한 감정도 자유롭게 표현돼 의종 2년(1148) 예부낭중 최루백은 부인 염경애에 대한 그리움을 시로 적어 묘지명으로 남기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결혼을 해도 ‘출가외인’이 아니었던 가족 내 고려 여성의 위치를 알 수 있다. 한편, 조선왕조에서는 유교적 이데올로기하에서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가족을 기초 단위로 가부장적 질서가 강화됐고 재가금지, 칠거지악, 삼종지도, 내외법 등을 만들어 여성들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조선 전기까지는 재산 상속도 훨씬 합리적이었고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서 유교체제를 공고히 유지하기 위해 종법제가 강화되고 여성의 권한과 지위가 축소되면서 엄격한 부덕과 여성의 생활이 제한됐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어느 시기보다 여성들의 문예활동이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허난설헌, 황진이, 강정일당 등 스스로 자신의 글을 남겼던 여성, 높은 예술적 경지에 도달한 여성, 성리학·실학에 조예가 깊은 여성 지식인들이 많이 배출됐다. 

근대 사회로 들어서면서 천주교나 동학, 개화사상에서 제시되는 남녀평등관과 근대 여성교육기관이 설립되면서 여성들의 의식이 깨어나고 사회 진출의 길이 열리게 됐다. 민족차별, 성차별, 계급차별이 내재된 일제강점기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여성들의 기본권을 찾는 의지는 고양돼 민족해방, 여성해방의 단초가 열리고 오늘날 여성의 지위향상에 이바지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됐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 인천 여성은 과연 어떤 삶을 개척해 왔는지 지금이야말로 인천 역사를 되돌아볼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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