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 시인
홍찬선 시인

역사는 아(我)와 피아(彼我)의 투쟁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에서 갈파한 말이다. 단재는 일본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침략해 강탈해 간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싸울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아와 피아의 투쟁’이란 역사관을 제시했다. 

단재의 역사관은 일제강점기 시대 상황을 정확히 간파한 탁견이다. 안중근 장군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이다. 대한 사람들이 제2, 제3, …, 제100의 안중근이 돼 싸운다면 대한 독립은 가능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만큼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처단은 역사적 의의가 컸다. 

실제로 안중근 장군의 의거는 약관의 이수흥(李壽興, 1905~1929)청년에게 항일무장투쟁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그는 1905년 이천군 읍내면 창전리에서 유학자 설산 이일영(雪山 李日榮)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면암 최익현의 제자였던 설산은 1905년 11월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이런 부친의 활동이 이수흥으로 하여금 어릴 때부터 일제의 민족차별정책에 분노하며 항일독립투쟁에 나서도록 한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원태우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거사를 그린 삽화와 원태우 의사 흉상.
원태우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거사를 그린 삽화와 원태우 의사 흉상.

# 제2의 안중근이 되려고 한 이수흥 의사

이수흥은 열일곱 살 때인 1922년 만주로 망명했다. 열네 살 때 머리를 깎고 출가했으나 아버지의 설득을 받아들여 환속하고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으나 독립을 이루지 못하자 무력투쟁밖에 없다는 결론에 따른 것이었다. 1920년 6월의 봉오동전투와 그해 10월의 청산리대첩으로 무력투쟁의 가능성이 높았던 때였다. 

그는 만주에서 채상덕을 만나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1925년 6월 중국 봉천성 경무국장 우진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스 사이에 ‘미쓰야협정’이 체결돼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이 큰 타격을 받았다. 채상덕은 이수흥에게 권총 두 자루를 주며 안중근을 본받으라고 당부한 뒤 자결했다. 

원심창 의사 사진과 집터 안내판.
원심창 의사 사진과 집터 안내판.

참의부 2중대 특무정사였던 이수흥은 모젤권총 1정과 실탄 147발, 구식 권총 1정과 실탄 29발을 갖고 압록강을 건너 경성에 잠입했다. 이천으로 향하다 동대문 부근에서 불심검문에 걸린 이수흥은 일제 순사를 사살하고 무사히 이천에 도착했다. 고향에서 친구 유남수와 함께 친일 행적이 있는 부자들을 찾아다니며 군자금을 모았다. 거부하는 자들은 처단했다. 일제 주재소와 면사무소도 찾아가 응징했다. 신출귀몰하던 그는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현상금에 눈이 먼 친척의 밀고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사형이 언도된 재판의 최후진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일제 재판부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 내가 기필코 대한 독립을 성취하려 했더니 원수들의 손에 잡혀 일의 열매를 못 맺고 감이 원통할 따름이다. 우리 동포 여러분들은 끝까지 싸워 우리나라의 독립을 성취해 주시기 바란다."

# 원태우 의사, 안중근보다 4년 앞서 이토를 저격하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이 있기 4년 전에 이미 이토를 저격한 일이 국내에서 있었다. 과천군 하서면(현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에서 태어난 원태우(元泰祐, 1882~1950)의사의 거사가 그것이다. 

원 의사는 농민이라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애국심과 의기는 매우 높았다. 그는 을사늑약을 강탈한 이토 히로부미가 기차를 타고 수원으로 사냥 갔다가 오는 길에 안양의 서리재를 지난다는 정보를 듣고 이토를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1905년 11월 22일, 불과 을사늑약 5일 뒤였다. 

원 의사는 동네 친구인 이만여 등과 함께 서리재 부근의 철길에 큰 돌을 갖다 놓아 이토가 탄 기차를 전복시키려는 작전을 세웠다. 어스름을 이용해 돌을 옮겨 놓고 기다렸다. 이토가 도착하기 직전에 이만여가 겁을 먹고 철길에 놓았던 큰 돌을 치웠다. 이토 처단 계획이 무산되려고 할 때 원 의사는 단독으로 거사에 나섰다. 평소에 갈고 닦았던 돌팔매 실력을 발휘해 이토가 탄 기차의 창문을 향해 돌멩이를 날렸다. 

원 의사가 던진 돌멩이는 유리창을 깨고 들어갔다. 이토의 얼굴에 유리파편이 여러 개 박히면서 피투성이가 됐다. 불행하게도 이토는 죽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는 그때 사망했다고 할 수 있다. 목숨을 건진 이토는 이 사건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꺼려 해 보도를 극히 제한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매일신보에서 이틀 뒤 단신란에 짤막하게 이 사건을 보도했고, 열흘 정도 지난 뒤 일본에서 발간된 「러일전쟁화보집」에 삽화와 함께 간단히 야유적으로 전해졌을 뿐이다. 

하지만 원 의사의 이토 처단 거사는 일제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다. 일제 군경은 원 의사를 체포해 상상할 수 없는 고문을 가함으로써 원 의사는 평생 성불구자로 살아야 했을 정도였다. 형식적으로는 2개월 금고에 곤장 100대라는 형벌로 대수롭지 않다는 형식을 취했던 것과 매우 다른 내용이었다. 게다가 원 의사는 해방될 때까지 일제의 극심한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  

이수흥 의사 동상과 그의 묘지.
이수흥 의사 동상과 그의 묘지.

# 원태우·이수흥에 이은 평택의 원심창 의사

원심창(元心昌, 1906~1973)은 1906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175번지에서 태어나 한국과 일본, 중국에서 항일독립투쟁에 나섰다. 원 의사는 육삼정 의거로 일제에게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2년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일제가 항복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옥에서 고생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함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백정기 의사는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1934년 6월 5일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에 옥사했다.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원 의사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의협심이 강했다. 평택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지 1년 뒤에 일어난 3·1대한독립만세운동에 가담했다. 이듬해인 1920년 3월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했다가 1922년 12월 일본 도쿄에 갔다. 

막노동을 하며 학자금을 마련한 뒤 1925년 4월 일본대학 사회학과 전문부에 입학했다. 하지만 학비를 벌지 못해 9월에 자퇴하고 11월 동경조선무산자동맹에 가입했다. 이때부터 아나키즘 운동에 전념했다. 1926년 7월 23일 박열과 함께 구속됐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가 의문사하자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자살이라는 경찰 발표에 의문을 품고 사건 경위를 밝히려 노력했고, 공동묘지에 가매장된 유해를 발굴해 화장한 뒤 박열의 선산인 문경에 안장했다. 

일본에서 항일운동을 하며 몇 차례 투옥됐다 풀려난 그는 1930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베이징과 상하이를 오가면서 아나키즘 운동을 이어가며 무력투쟁도 병행했다. 1933년 상하이에서 일어난 육삼정 의거는 대표적인 의열활동이었다. 일본공사를 죽이려고 모의했다는 것만으로 무기징역 판결을 내릴 정도로 일제의 강압 통치는 지독했다.

이수흥 의사가 사용한 권총.
이수흥 의사가 사용한 권총.

# 잊히고 뒤틀린 의열·무장투쟁 발굴하고 바로잡는 게 역사

20세기 위대한 역사가인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역사는 고정돼 있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관점에서 끊임없이 재해석함으로써 새로운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역사는 아와 피아의 투쟁인 동시에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 투쟁과 대화를 통해 잘못된 과거와 현재를 바로잡고 올바른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낸다.

강탈당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의열·무장투쟁은 경기도에서도 수없이 일어났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투쟁은 그다지 많지 않다. 어렵게 발굴한 투쟁 사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스물넷의 젊은 투사였던 원태우 의사가 일본 화보에 실린 그대로 갓 쓰고 도포 입은 노인의 모습으로 흉상(胸像)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원심창 의사의 방치된 집터도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하는 현실이다.

대한 독립을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초개처럼 바치신 선열들이 투쟁하신 자취를 찾아내고 국민들과 후손들에게 알려 주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맡겨진 과제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잘못된 현재의 인식을 바르게 고치는 것이다. 올바른 미래를 위해 잊히고 뒤틀린 과거를 찾아서 바로잡는 것이 바로 역사다. 

글·사진=홍찬선(시인/위례역사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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