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흥구 인천시문인협회 이사
황흥구 인천시문인협회 이사

며칠 전 일이다. 아내가 아침 밥상머리에서 안쓰럽다는 듯이 한마디 건네었다. 

"여보, 아무래도 당신 보약 좀 먹어야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살이 찐다고 야단인데 당신은 몸이 빠졌다고 하니 이상하지 않아요? 기운도 옛날만 못하고…." 

"웬일이야, 당신이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다니? 나는 괜찮으니 당신이나 먹든지 하구려."

아내의 뜬금없는 말에 나도 퉁명스럽게 한마디 보태었다. 그런데 사실은 요즈음 왠지 피곤하고 공연히 짜증만 나는 것이 예전만 같지 않음을 새삼 느낀다. 코로나로 ‘집콕’하기 때문일까?

그래도 매일 아침 뒷산에 오르고 매주 동네 테니스클럽에 다니면서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체력은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퇴직 후에는 쉽지 않은 국궁도 익히고 필드는 자주 못 가도 가끔 친구들과 스크린골프 치면서 남들 이상으로 운동을 하는데 기운이 옛날만 못하다니….

가만 생각해 보니 아내의 뒤끝을 흐리는 말이 무슨 뜻인지 집히는 데가 있었다. 엊저녁 잠결에 아내가 은근슬쩍 내 허벅지 위에 다리를 얹어 놓기에 홱 돌아 뉘었더니 심사가 토라져 그 말을 했나 싶다. 사실 이날 이때까지 몸에 좋다는 건강보조식품이라고는 별로 먹어 보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보약이라니 그동안 자신만만해 하던 자신이 측은해 보였다. 생각해보면 갑자기 이렇게 체력이 떨어진 원인은 그놈의 술 때문이리라. 

직장 다닐 때는 저녁이면 매일 회식이다 주말이면 동창회와 친목회까지 전부 챙기다 보니 술을 안 마시려야 안 마실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마시고 퇴직한 지도 7, 8년이 지났으니 자동차로 말하면 타이어도 바꾸고 엔진오일도 갈아 줄 때가 되지 않았던가? 아침에 큰소리치긴 했지만, 아내한테 전화를 걸었다. 

"당신이오? 아침에 한의원 잘 아는 데 있다고 했지? 언제 한번 가봅시다."

며칠 후 아내와 함께 그 한의원에 가서 맥을 짚어본 뒤 보약 한 제를 지었다. 그리고는 약 먹는 동안은 차고 맵거나 술, 커피 등 자극성 있는 음식, 닭, 돼지고기 등 기름진 음식도 삼가라고 특별히 당부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그중에서 술을 끊는다는 것은 쉽지 않을 거라 생각됐다. 그동안 한두 번 끊어본 술도 아니고 내일부터 두부모 자르듯 끊을 수 있을까? 당장 이번 주 토요일은 장모님 생신에 모처럼 처가댁 식구들이 다 모여 한잔할 텐데 맏사위인 내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굴 순 없지 않은가.

엊그제는 과거 같이 근무했던 동료가 모처럼 전화해 거나하게 한잔했다. 다음에는 내가 한턱내겠다고 한 약속을 도저히 한 달 이상을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아내와 상의한 결과 장모님 생신에 다녀오고 그동안 빚진 술 다 갚고 난 다음 보약을 먹기로 했다. 

그 이튿날부터 나는 아무런 부담 없이 술을 마셔 댈 수 있었다. 직장동료와 약속은 물론 이렇게 저렇게 해서 어지간히 마시고 이젠 좀 끝났지 싶었는데 그러나 술이라는 게 피하고 싶을 때는 마실 기회가 더 오게 마련이다.

소래포구에서 배를 부리는 친구가 갓 잡은 대민어 한 마리와 요즘 한참인 꽃게를 한 솥 가득 쪄 놓고 오라고 하는데 술 한잔이 빠질 수가 있을까? 이래저래 얻어먹기도 하고 사기도 한 술이 한, 두 주일은 견딜 만했다.

이러던 차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하늘이 노랗고 식은땀이 비 오듯 하면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었다. 이때 심상치 않음을 느낀 아내가 다급하게 119에 전화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응급실에 도착한 아내는 사색이 돼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병 고치려다 생사람 잡게 생겼으니…."하고 울먹였다.

그 순간 나는 "으음 여보! 내일부터는 나 보약 먹는 날이야…." 허공에 대고 헛소리를 외쳐대고 있었다. "에그, 그놈의 보약이 뭐길래…." 아내가 한숨을 내쉬며, 환자 침대에 실려 중환자실로 들어가는 내 얼굴을 걱정스럽게 지켜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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