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좌우명(座右銘) 하나쯤은 가슴 한편에 품고 산다. 그럴듯한 말로 철학이라고도 한다. 늘 옆에 두고 반성의 거울로 삼는다는 격언 말이다. 대개는 책, 영화 등속에서 접한 감탄해 마지않는 유명인사들의 어록에서 차용한다. 처음에는 ‘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나도 이런 멋진 좌우명이 있다’는 걸 젠체하려고 스스로 소화하기도 버거운 문장을 억지로 우겨 넣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만의 금언으로 갈고 닦는다. 

기자는 대학교 1학년 때인 1988년 3월 하순께 좌우명을 오른쪽 ‘팔뚝’에 새겼다. 그 전까지는 ‘가정의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는-그 흔하디 흔한- 가훈 하나 없었던 터라 딱히 삶의 지표로 삼는 문구를 갖지 못했다. 우리 집에는 대다수 가정에 걸려있는 ‘근면·성실·정직’이라고 쓰인 창호지를 넣은 사각 나무액자 하나 없었다. 뼈대 있는 가문에 가훈 하나 없다고 빈정거리는 이웃도 있었지만 그건 오해였다. 이런 저런 이유로 뼈를 깎는 각오를 하도 자주 다지다 보니 어느 시점부터 연체가문(軟體家門)이 됐다는 사실을 몰랐으리라.

쓸데없는 말이 지나치게 많았다. 당시 새겼던 좌우명은 ‘죽을 때까지만 살자’였다. 지금도 그 글귀는 나의 거울이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죽고 나서는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이름 따위를 남겨서 영생을 꿈꾸지 않겠다는 각오다. 구차하게 살지 말자는 결심이다. 후회 없는 삶을 살자는 자기 암시다.

최근에 ‘민중시인’이자 ‘민족시인’이라는 칭송을 받는 김남주 시전집을 다시 펼쳤다. 가볍게 넘기다 빛바랜 형광펜이 그어진 시구에 시선이 멈췄다. 잽싸게 새로운 좌우명 하나를 왼쪽 팔뚝에 추가로 아로새겼다. "정의와의 싸움에서 불의가 이겼다고 해서 불의가 불의 아닌 것은 아니다. 불의와의 싸움에서 정의가 졌다고 해서 정의가 정의 아닌 것은 아니다." ‘그날’이라는 시의 마지막 부분이다.

운명의 시간이 째깍째깍 다가오고 있다. 윤석열 검찰‘청’장에 대한 법무부의 징계위원회 개최 시점이 임박한 것이다. 결과야 어렵지 않게 예견된다. 한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윤 ‘청’장의 좌우명은 무엇일까. 설마 ‘수사권으로 보복하자’거나 ‘버틸 때까지 버티자’는 아닐 테지. 정권에 희생된 불운의 저승사자라는 별명을 얻고 싶은 건 더더욱 아니겠지.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