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50세 60세가 되면 죽음이라는 것이 한층 가깝게 느껴진다. 대부분의 사람이 소중한 사람과 사별을 경험하기 시작하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마음의 고통은 헤아릴 길이 없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 고통이 지워지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슬픔이라고 해서 인간의 여덟 가지 고통 가운데 하나로 ‘애별리고(愛別離苦)’라고 한다. 함께 동고동락해온 형제나 친구를 잃으면 나의 일부가 잘려 나간 듯 고통스럽다. 몇 년 전 한 친구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생전에 우리가 함께했던 옛 시간을 추도했다. 친구를 잃으면 누구나 큰 상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친구를 생각하고 친구와 함께한 추억을 자기 안에 간직한다면 그 뒤로도 친구와 영원히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우리가 좋아했던 유명한 가수나 배우가 세상을 떠나면 굉장한 상실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래서 그 가수의 노래를 계속 들어보거나 유명 배우가 출연한 영화를 보기도 한다. 

이미 세상을 뜨고 난 다음에 이렇게 추도하는 일은 때늦은 것 같기도 하지만 추도하는 마음이 고인을 더 진지한 태도로 마주하게 한다. 슬프지만 고인의 열정을 이어 받는다는 의미에서는 상실도 또 다른 만남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생의 반려자와 사별하는 일은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준다. 특히 여성보다 남성이 깊은 마음의 상처가 커서 더 흔들린다고 한다. 배우자의 죽음은 누구든지 경험하는 일이지만 그 상실감에 무척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누구의 고통과도 어떤 괴로움과도 비교할 수가 없는 절대적인 아픔이다. 

어서 배우자의 곁으로 가고 싶다. 나도 따라 죽으면 모든 고통에서 해방될 것이라며 고통스러워 하고, 이 고통이 영원히 계속되지 않을까 두려움도 있다고 한다. 우리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말로 위로를 하지만 어떤 말도 헛되이 들리고, 내 슬픔은 시간이 낫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더 특별하고 더 아프고 절대 치유되지 않는 아픔이라고 여기며 고통스러워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역시 시간은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듯 여러 가지를 해결해 주는 법이라고 한다. 즉 어떤 이별의 아픔도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 50세 60세가 되면 이제는 자기 죽음도 현실로 다가온다. 

그 불안과 공포를 어떻게 극복하면 좋을까?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데 두려워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죽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 죽음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해줬다면 또 모를까 아직 그런 사람을 만나 본적이 없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알지도 못하는데 불안해 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천 상병 시인의 ‘귀천’ 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큰형님 소풍 즐거우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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