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장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장

일본군으로 중국 전선에 투입됐다가 패전 후 아메바성 이질에 걸려 사망한 아이 미쓰(1907~1946)의 작품 ‘눈(眼)이 있는 풍경’이 화제다. 그는 32세가 되던 해 이 그림을 그렸다. 노구교 폭파 사건과 남경대학살을 일으키고 중국 대륙을 집어삼키려는 야욕으로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한 바로 그해다. 벌써 80여 년이 흐른 지금 작품 중앙에 빛나는 눈은 마치 오늘의 참담한 세상과 허물어져 가는 미래를 응시하고 있는 것 같다는 평이 화제의 핵심이다. 

일본 사회는 지금 총체적으로 붕괴 현상을 보인다. 연기된 올림픽이 무산될지 모른다는 위기 속에서 코로나19 감염은 기승을 부리고 있으며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자신의 정치적 부패 의혹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고 말할 뿐 일체의 증거자료 제출을 거부하는 등 행패를 부리고 있다. 스가 총리 역시 정치적 수사만 남발할 뿐 실효성 있는 조처는 안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도쿄 시부아구에서 노숙자 여성을 "눈에 거슬린다"고 죽인 남성, 오사카에서 모녀가 소리 없이 굶어 죽은 일 등 사회적 약자가 내버려지고 있는 일에 눈감고 있다. 한마디로 붕괴하고 있는 사회적 참사를 나 몰라라 하는 것이다. 

중국의 네티즌들은 이런 일본을 은근히 조롱하고 있는데 미국에 대해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바이든 대통령 시대가 열렸으나 아직도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트럼프 전 대통령과 컬트적인 음모론을 지속해서 유포하고 있다. 어쨌든 일본과 미국은 거짓말이나 속임수가 부끄러움 없이 횡행하는 사회, 대화와 논의가 성립되지 않는 어두운 세상으로 가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낸 공화당원 슈워제너거가 "나는 역사상 가장 악한 정권에 참여한 죄책감을 술로서 달래려는 망가진 남자들에 둘러싸여 자랐다"면서 "나치스 같다"라는 비유로 트럼프 시대를 통박한 내용을 퍼 나르느라 바쁘기만 하다. 

이제 남한과 북한, 미국과 중국 4자 회담을 통해 동북아의 평화 발걸음을 더 발전시켜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 ‘눈이 있는 풍경’과 미·일의 사회적 붕괴 현상은 간단치 않은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바이든 정부의 아시아 정책 핵심은 전 정부와 같이 대중국 견제라고 알려져 있으며 북핵 문제에 대해서는 ‘심각한 위협’으로 여겨 대북 제재를 더 강화하리라는 예측이 우세한 실정이다. 동북아의 평화 무드는 북한 핵무기 폐기나 동결이라는 합의가 전제될 때 가능한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낙관보다 비관이 현실적인 판단이고 갈 길은 요원하다는 게 중론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미국과 일본이 쇠퇴하면서 스스로 무너지는 것 자체는 나쁜 일이라고 하긴 어렵다. 다만 그 과정에서 우리의 노력이 헛수고가 될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면 오싹해진다. 붕괴하는 그들 사회가 인류에게 끼칠 해악도 만만치가 않을 터이고. 하지만 이제 충돌이 아니라 조화를 찾아야 하는 절체절명의 시기임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우선은 미·중 대결에서 북핵 해결을 분리해야 할 것이다. 2019년 2월 하노이 회담 실패 이후 북·중 관계는 긴밀해졌고 남북관계는 멀어졌으며 북한의 대미 요구는 강경해졌다. 달라진 상황을 고려하면 중국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졌다. 구조적으로 미국과 중국이 협력하지 않으면 북핵 해결은 거의 난망이다. 우리가 미·중 대결의 완충지대가 돼야 하는 이유다. 

그 다음에 공급망의 분단을 막아야 한다. 북한은 최근 자력갱생 전략을 택했다. 중국은 국내 순환이 되는 쌍순환 전략을 선언했고. 문제는 중국의 지속적 북한 지원이 자칫 제재가 장기화하면 북·중 경제권이 구조화될 것이며 공급망의 분단은 군비 경쟁과 함께 남북관계의 원심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런 바탕 위에서 신뢰 구축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건 분명하다. 협상이건 회담이건 지속하면서 신뢰성을 쌓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누가 부정하랴. 

‘눈이 있는 풍경’의 그 빛나는 눈빛은 무참한 미래를 응시하는 것에서 출발할지 모르나 이 눈빛에서 우리는 새삼 어지러워지는 세상, 인권이나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가 그 누구로부터도 무시당하지 않는 미래를 향해야 하는 기대와 노력을 발견해야 한다. 온통 붕괴하는 세상에서 공허한 울림이 아닌 절실한 소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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