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찾아오는 옛사랑의 기억이 있다. 머릿속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까맣게 잊고 있던 그때 그 시절, 그때 그 감정, 그때 그 사람이 불쑥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여운이 긴 꼬리처럼 잔향을 남긴다. 한동안은 문득문득 쓸쓸함이 남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잊혀지게 마련이다. 1961년 개봉한 영화 ‘이수’는 그런 감정을 파고드는 작품이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 돌이킬 수 없는 선택.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움이 차오르는 것을 막을 재간이 없다. ‘이별의 슬픔’을 뜻하는 영화 ‘이수(離愁)’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원작으로 한다.

 마흔 살의 인테리어 디자이너 폴라는 오래된 연인 로제와 뜨뜻미지근한 연애 중이다. 화물업을 경영하는 중년의 로제는 젊게 살고 싶다는 일념으로 오픈카를 타고 속도를 즐긴다. 그리고 자주 젊은 여자들을 만난다. 반면 폴라의 생활은 일과 사랑 두 가지로만 채워져 있다. 혼자 살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커리어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연애는 그렇지 못하다. 이혼 후 만난 로제와는 한때 열정적으로 사랑했지만 최근에는 예전 같지 않다. 의무적으로 주말에 만나긴 하지만 그조차도 로제 쪽에서 일방적으로 깨곤 했다. 

 그렇게 권태가 찾아왔을 때 풋풋한 청년 필립이 폴라에게 묻는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15살이나 어린, 그래서 철부지라 생각한 이 청년이 폴라의 외로운 마음속으로 뚜벅뚜벅 걸어온다. 그러나 필립의 순애보적인 사랑이 깊어질수록 폴라의 고민 또한 짙어진다. 세상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 뒤를 보게 된다. 게다가 뒤늦게 폴라의 빈자리를 체감한 로제가 돌아와 달라며 애원한다. 이에 폴라는 필립에게 이별을 고한다.

 영화 ‘이수’는 연상연하의 사랑과 삼각관계라는 통속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매력적인 배우들의 열연으로 소설이 그려 낸 섬세한 감정을 훌륭하게 전하고 있다. 우선 지적이고 우아한 매력의 잉그리드 버그만은 사랑 뒤에 허물처럼 남겨진 쓸쓸한 감정까지 껴안으며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주도한다. 작품 전반으로 보자면 이 영화는 가을의 정서와 닮았다. 브람스의 3번 교향곡 F장조 작품 90의 3악장은 영화 내내 폴라의 감정을 대변하며 고독한 음을 쌓아 간다. 

 그러나 이 영화의 백미는 필립 역의 안소니 퍼킨스라 하겠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 작품은 완성될 수 없을 만큼 순수하고, 싱그러우며, 로맨틱한 청년의 모습을 잘 소화해 냈다. 사실 대중들에게 배우 안소니 퍼킨스는1960년에 개봉한 스릴러의 고전 ‘싸이코’에서 모텔을 운영하는 정신이상자 노먼 베이츠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영화 ‘이수’ 속 안소니 퍼킨스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청춘을 눈부시게 표현했다. 그 결과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의 영광도 안았다. 안소니 퍼킨스가 열연한 필립의 사랑스러운 모습만 보자면 영화는 약동하는 봄의 푸르름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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