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사람은 보이는 것만을 믿으려 합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으면 불신하곤 하죠. 그런데 사람마다 보이는 것은 제각각입니다. 이런 이유로 갈등과 다툼이 계속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헤아릴 수 있어야 불신과 갈등이 줄어듭니다.

‘거지의 밥그릇’이란 제목의 글이 「현자들의 철학 우화」(한상현 저)에 실려 있습니다.

골동품을 모으는 게 취미인 스승에게 제자가 찾아왔습니다. 거실 곳곳에는 귀한 골동품들이 즐비합니다. 그런데 전에는 보지 못한 그릇이 하나 보여서 제자가 어디서 구했냐고 물었더니, 스승은 구걸하다가 죽은 거지가 들고 다닌 밥그릇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귀한 골동품을 갖고도 거지 생활을 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제자에게 스승이 말해줬습니다.

"그 거지는 이 그릇을 갖고 내 집 대문 앞에서 죽었어. 내가 보기엔 그가 이것을 골동품으로 볼 안목이 없었던 거지."

왜 거지는 자신의 그릇이 값비싼 골동품인지를 몰랐을까요? 그가 ‘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살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예컨대 ‘돈’만이 최고의 가치라고 믿는 사람은 이상세계를 주장하는 철학자들의 말을 ‘현실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치부해버리기 쉽습니다. 

‘지위’와 ‘권력’만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승리하는 열쇠라고 믿는 사람은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한심하게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 역시 ‘거지의 밥그릇’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거지의 그릇이 돈과 지위와 권력이라는 낱말로 바뀌었을 뿐이니까요.

돈과 지위와 권력만을 따라가느라 주변을 헤아리지 못하고 살다가, 나락으로 떨어진 다음에야 깨닫곤 합니다.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를요. 

내가 중요하다고 믿고 있는 ‘밥그릇’이 소중한 ‘골동품’으로 바뀌게 하려면 ‘호기심’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주장이 나의 그것과 충돌해 마음이 불편해질 때마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고 있을까?’라고 자문해 보는 것이 호기심으로 그를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그럴 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제야 그의 말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의 말을 이해했을 때 문득 그동안 몰랐던 깨달음을 얻기도 합니다. 이때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새로운 것을 알게 돼 희열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인생을 아름답게 사는 작은 이야기」(이도환 저)에 손녀를 무척 사랑한 할머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손녀 역시 할머니를 좋아해서 주말이면 늘 할머니를 뵈러 왔습니다. 어느 날 손녀가 할머니에게 성당에 잘 다니시냐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그렇다고 하시며 "지난 일요일에는 아침저녁으로 두 번씩이나 갔는걸"이라고 했습니다.

신부님이 어떤 강론을 하셨냐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모두 잊어버렸다며 웃으셨습니다.

"할머니, 성당에 두 번씩이나 다녀오시고도 잊으시니, 이젠 그냥 집에서 쉬시면 어때요?"라고 손녀는 밝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때 할머니는 손녀에게 구멍이 숭숭 뚫린 낡은 바구니에 물을 가득 받아 장미 화단에 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당황한 손녀가 물을 담아 화단에 도착도 하기 전에 물이 다 새어버릴 것이라고 하자,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하지만 그 바구니는 좀 더 깨끗해져 있지 않을까?" 

‘아!’, 하고 탄성이 나옵니다. 손녀는 바구니에 물을 담아야 한다는 것에만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구니가 씻긴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만약 손녀가 할머니의 무모한(?) 부탁에 ‘호기심’으로 그 부탁을 되새겼다면 어땠을까요? 

보이지 않는 것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이 곧 지혜입니다. 그러려면 호기심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호기심이 풀렸을 때는 저절로 탄성이 나올 겁니다. 호기심과 탄성이 선사하는 지혜가 거지의 밥그릇을 귀한 골동품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돼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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