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어보
126분 / 역사 / 12세 이상 관람가
 

영화 ‘자산어보’는 섬으로 유배돼 바다가 궁금해진 학자와 바다를 벗어나 출셋길에 오르고 싶은 청년 어부가 책을 집필하며 벗이 돼 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이준익 감독이 ‘동주’ 이후 두 번째로 내놓은 흑백영화이다. 

 순조1년(1801) 신유박해로 정약종은 참수를 당하고, 정약전(설경구 분)과 정약용(류승룡)은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난다. 호기심이 많았던 정약전은 성리학 대신 지천으로 보이는 바다 생물에 관심을 두게 되고, 섬 청년 창대(변요한)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창대는 사학죄인을 도울 수 없다며 거절한다. 

 양반에게 버림받은 서자였던 창대가 홀로 글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정약전은 서로의 지식을 거래하자고 제안하고,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며 서로의 스승이자 벗이 돼 간다. 

 이 감독은 "사극을 찍어 오면서 궁극에는 근대성이라는 건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했고, 커다란 사건이나 정치, 전쟁사로 그 시대를 규정하는 건 오류라고 생각한다"며 "시대와 불화를 겪은 개인을 하나씩 찾다 보면 집단이 가진 근대성의 씨앗이 보인다"고 역사 속 인물에 천착하는 이유를 밝혔다.

 영화는 촬영을 위한 제반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흑산도 대신 흑산도에서 가장 가까운 도초도와 비금도, 자은도에서 촬영했다. 여러 차례 불어닥친 태풍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태풍이 남기고 간 파도는 영화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어 냈고, 이 감독이 "자연은 우리 영화의 스태프"라고 했을 만큼 영화는 섬의 절경을 눈부시게 담아냈다.

 임금 없는 평등한 세상을 꿈꾼, 시대를 앞서 간 학자의 면모는 물론 무식하고 욕심 많은 흑산도 관리 별장(조우진)을 윗전과 친하다는 거짓말로 속여 먹고, 지낼 곳과 먹을 것을 내어 준 따뜻한 인심에 수줍은 듯하지만 할 말은 다하는 흑산도 여인 가거댁(이정은)과 정약전이 나누는 알콩달콩한 로맨스는 소소한 웃음을 선사한다.  

 중·후반까지 밝고 경쾌한 리듬으로 진행되는 섬마을 속 이야기는 창대가 글공부를 마치고 세상으로 나가며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준익 감독과 배우 설경구가 불러 모은 화려한 출연진이 영화를 촘촘하게 채운다. 새로운 차원의 밉살스 러움으로 웃음을 선사한 조우진은 물론 오랫동안 이 감독과 함께 해 온 정진영부터 류승룡, 동방우와 방은진, 김의성 등이 짧은 분량에도 우정으로 함께 했다. 영화 ‘자산어보’는 31일 개봉한다.

  이창호 기자 ych23@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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