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심심치 않게 사용되는 용어가 있다. 바로 ‘가스라이팅’이다. 이는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당하는 사람을 혼란에 빠트리고, 급기야는 자신의 판단을 믿을 수 없어 가해자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행태를 일컫는 심리학 용어다. 1938년 연극 ‘가스라이트(gas light)’에서 유래됐다. 오늘은 동명의 작품을 영화화한 1944년 영화 ‘가스등’을 소개한다.

부모를 잃고 이모와 함께 살아가던 폴라는 청소년기에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다. 유명 오페라 가수인 이모 앨리스 엘퀴스트가 자택에서 살해된 것이다. 이에 폴라는 런던을 벗어나 이탈리아로 향한다.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아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지만 폴라는 늘 외롭고 쓸쓸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그레고리가 달래 준다. 만난 지 2주 만에 서로에게 푹 빠진 두 사람은 서둘러 결혼을 결심한다.

파리에서 신혼을 꾸리고 싶었던 폴라와는 달리 오랫동안 런던에서의 생활을 동경해 왔다는 남편의 뜻에 따라 폴라는 10년 만에 영국으로 돌아온다. 런던 손튼광장 9번지 저택. 이곳은 폴라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집이자 이모가 사망한 곳이기도 하다. 자상한 그레고리는 아내가 더 이상 이모와의 기억으로 슬프지 않도록 집 안을 새롭게 단장하자고 제안한다. 이모의 유품은 몽땅 다락에 넣어 버리고 입구도 폐쇄해 버리자는 말은 폴라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행복한 신혼은 길지 않았다. 폴라의 건강에 이상이 찾아온 것이다. 건망증이 늘었고, 환각과 환청도 느꼈다. 특히 남편이 외출한 뒤 홀로 방 안에 있을 때마다 가스등 불빛이 희미해졌고, 이모의 유품이 쌓인 다락에서는 쿵쿵 소리도 났다. 이에 남편은 아내의 평판을 위해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다. 폴라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 노력할수록 남편은 아내의 정신 상태가 갈수록 심각해진다며 질책한다. 그러나 엄격한 남편이 두려울수록 의존도는 높아졌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사람은 그레고리밖에 없는 상황에서 폴라는 더욱 처절하게 남편의 애정을 갈망한다.

영화 ‘가스등’은 부유한 여성의 재산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남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내 몰래 다락에 침입한 남편은 이모의 유품 중 고가의 보석을 찾아 밤마다 다락을 헤집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소음과 다락방에 가스불이 켜지면서 자연스레 아내의 방 불빛이 잦아들어 간 것 모두를 그레고리는 아내의 정신병이라 주장했고 아내는 그 말에 세뇌된다. 

흑백영화인 이 작품은 런던이라는 도시가 갖는 안개 낀 풍경, 가스등 불빛으로 강조된 그림자의 섬뜩함이 스릴을 강화한다. 그레고리 역의 샤를르 보와이에는 표정, 말투, 권위적인 분위기로 아내를 정신적으로 압박하는데, 이는 관객들마저 숨막히게 한다. 학대를 당하는 역의 잉그리드 버그만은 아름다웠던 초반과는 달리 극이 진행될수록 피폐해진다. 특히 정신적 혼탁으로 쇠약해진 심리상태는 초점을 잃은 황망한 눈동자와 더듬거리는 말투와 행동으로 나타나는데, 보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평등해야 할 인간관계가 주종관계로 변모되는 가스라이팅의 가장 큰 폐해는 피해자가 조종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영화 ‘가스등’은 최근 문제시되고 있는 심리적 학대인 가스라이팅의 심각성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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