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첫 주는 배우 윤여정의 오스카 여우조연상 수상 소식으로 뜨거웠다. 영화적 성취와 함께 특유의 솔직하고 유쾌한 입담이 돋보인 수상 소감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윤여정은 아카데미에서 자신을 영화계로 이끈 고(故) 김기영 감독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는데, 2년 전 봉준호 감독도 칸영화제에서 김기영 감독에게 존경의 뜻을 전한 바 있다. 국내외 영화계에서 시대를 앞선 천재 감독으로 일컬어지는 김기영은 사회의 비정상적인 모습을 병리적 관점으로 포착했다. 윤여정 배우의 영화 데뷔작 ‘화녀(1971)’는 급격한 산업화가 가져온 계급 간 충돌과 뒤틀린 욕망의 광기를 강렬하게 보여 준 작품이다.

친구와 함께 상경한 명자는 직업소개소를 통해 중산층 가정의 식모로 취업한다. 양계장을 운영해 큰돈을 벌어들인 사모님 정숙은 가정경제를 책임지고 있다. 번듯한 이층 양옥집도 악착같이 노력한 결과다. 반면 남편 동식은 경제력과는 거리가 멀다. 작곡가로 활동하는 그는 실력보다는 잘생긴 외모로 가수지망생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언뜻 보기에 이 가정은 화목하고 별 탈 없어 보였지만 셋째를 임신한 정숙은 두 아이를 데리고 친정 나들이에 앞서 남편에 대한 불신으로 불안하다. 이에 명자에게 철저한 감시를 당부하고 집을 나선다.

하지만 사모님의 부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뜻밖에도 명자가 동식의 아이를 임신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황당한 사실을 알게 된 정숙은 명자를 달래고 회유해 아이를 유산시키고, 하녀와의 동거가 불편해진 정숙과 동식 부부는 명자를 내칠 궁리를 한다. 이를 알게 된 명자는 주인집 부부의 위선을 처절하게 응징한다.

영화 ‘화녀’는 김기영 감독의 대표작인 ‘하녀(1960)’를 1970년대 시대상에 맞게 재해석한 작품이다. 간단히 보자면 외부에서 온 침입자 하녀가 평화로운 중산층 가정을 파괴하는 스토리라 읽을 수도 있겠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중산층 가정은 하녀가 오기 전부터 내부의 문제로 균열을 보이고 있었다. 가정부인 하녀는 붕괴를 촉진시킨 촉매제일 뿐 핵심 원인은 아니었다. 급속도로 전개된 물질만능주의와 허울만 남은 가부장제의 허상은 전복된 계급 간 투쟁과 뒤틀린 성욕과 결합해 기이하게 꿈틀대는 괴물을 낳았다. 

‘화녀’에서 명자를 연기한 윤여정은 제도권 사회가 만든 여성의 역할에 갇혀 희생당함과 동시에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꿰뚫어 보는 파격적인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해 데뷔작으로 여우주연상과 신인상을 동시에 석권했다. 그녀는 ‘화녀’의 명자를 통해 순수하지만 염세적이고, 수줍으면서도 도발적인 다층적 캐릭터를 탁월하게 보여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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