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인간사 겨를 없어도 계절은 어김없이 오간다. 그 중 오월은 왜 계절의 여왕이랄까. 사월에 핀 꽃들은 지고, 또 새 꽃들이 피는 가운데 모성 품은 신록이 오월을 만들기 때문이다. 요즘은 마을 길거리마다 토종은 물론 외래종까지 각양각색 꽃들이 예제에서 눈인사한다. 그래도 근 반백 년 동안 오월을 대표하는 이 강산의 꽃은 역시 아카시아꽃이 아닐까 싶다. 

산기슭이나 들 둔덕마다 온 몸에 새하얀 꽃떨기들을 튀김 틀에서 튀밥 튀기듯 내뿜는 모습에 유독 애착하게 된다. 향기도 향기려니와 어릴 때 추억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당시 헐벗은 온 나라 땅에 산림녹화 수종으로 장려돼 그 씨앗을 따 모아 내던 초등학교 과제물의 하나였다. 그 시대로 들어가 본다. 코로나19 비대면 정국 속에 수시 소통되는 이 시대 스마트폰을 잠시 꺼둔다. 

1960년∼70년대 초반, 서민들 특히 시골은 일반 전화기도 거의 없던 때였다. 그때 고교 교과서에 실린 이양하의 ‘신록예찬’은 시방도 엄연히 유효하다. 그 담녹색 ‘초록에는 청탁(淸濁)이 없다’고 했다. 아카시아 잎사귀를 비롯해 연녹 빛의 강렬한 생명성은 그 자체만으로 청신하고 고귀하다. 오월은 가까운 산허리마다 연초록 진초록의 신록바다를 둘렀는지, 솔솔바람에 일렁이는 잔물결은 온통 윤슬처럼 반짝인다. 

"아카시아나무 그늘 아래/눈 감고 가만있으면| 어제 종일토록 헤맨 여독의 잔해가/이맛바람에 실려 간다… 가설극장 서커스단의/배경음악이 현란할 때| 박수 소리, 아이들 함성이/온 세상 가득 실려 오고| 옅게 화장한 신록들은/해원(解원)의 노래를 부르노니| 백일몽도 좋다/꿈을 꾸어라…" 내 처녀시집 「바다는 외로울 때 섬을 낳는다」에 있는 자유시 ‘바람 불어, 오월’의 일부다. 원래 서커스단 가설극장 옆에 섰던 후박나무를 아카시아나무로 바꾸었더니 제격이다.

이제 이 신록 오월에 가상의 편지를 써본다. 이메일, 카톡 같은 즉응성의 SNS가 아니다. 문청시절 벗들이나 이성 사이, 또는 손 윗분에게 즐겨 쓰던 종이편지다. 잉크를 찍어 세로글로도 내리썼던 펜촉의 감각을 느낀다. 손 편지, 또는 아날로그 편지라 할까. 편지를 쓰는 동안에는 상대방을 그리는 상상의 우주가 펼쳐진다. 때마침 손 편지로 서로의 삶에 위로를 주는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가 방영되고 있다. 

이는 10여 년 전 폴더폰 시대 이야기임에도 아날로그의 치유를 그리고 있다. 그보다도 수십 년 앞선 나의 종이편지는, 느릿느릿 간헐적 소식이라 해도, 내용의 단순한 전달을 넘어 기쁨과 슬픔 그 전부였다고 할 수 있다. 편지를 보내드릴 대상에는 우선 몇 분의 은사님이 계신다. 근년까지 그 흔한 휴대전화 하나 없이 순 아날로그 생활로 지내는 분도 계신다. 

소년시절 여자 학우도 드물게 떠오른다. 오늘은 우리 딸에게 편지를 쓴다. "내 사랑하는 우리 딸! 그동안 엄부자모 밑에서 이만큼 열심히 살아준 것만도 대견하다. 그렇게 아등바등 쉴 틈 없이 노력해 왔는데, 이놈의 세월이 왜 이리 엄혹한지 힘들게 생활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고교 학창 시절, 우수한 성적에 소설까지 써서 대학교수소설가협회로부터 당선돼 수상과 축하연에 함께했던 일들이 어제 같다. 네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떳떳한 사회인으로 독립하기를 바라는 노파심에서 그간 너에게 했던 내 자신이 참 슬펐다. 속눈물을 참아가며 하늘에다 무사하기를 빌고 빌었다. 지금 이 나라가 선진 문명사회로 들어섰다지만, 주변 20, 30대 청춘들이 겪는 생계 고초에는 가슴이 저민다. 퇴원하면 부디 몸조리 잘 하여 건강하게 살기 바란다……." 우리 숨을 쉰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아날로그의 행복!― 이 글을 읽는 순간에라도 좌든 우든 멍 때리듯 다 놓아보자.

"시방,/찾아오는 이 계시다면/아직 살아 있다 하여라/그도 나름이겠지만 그리워 온다면 더할 나위 없는 것| 훗날,/찾아오는 이 없더라도/기억해주는 이 계시다면/그래도 살아 있다 하여라, 살아 있다 하여라| 더 먼 훗날/찾아오는 이도 기억해주는 이도 없어지면/그제야 정녕 살아 있다 하여라| 거꾸로 그대를 기다리는 허공이 있기 때문이다/푸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내 졸음 ‘살아 있음에’ 전문이다. 시조로 더한다.

- 연초록 모성(母性) -

 이 저 자녀 다 껴안은
 어머니는 오월이다

 

 연초록은 어머니의
 속마음을 타고 났다

 

   ‘살았어!’
   그 말 할수록
   온 우주가 약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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