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내일은 ‘스승의날’입니다. 요즘은 스승의날 행사가 사라졌지만 제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감동의 눈물을 흘리곤 했던 날이었습니다. 뉴욕타임스(2012년 1월 6일자)에 하버드대학과 컬럼비아대학의 경제학 연구팀이 20년에 걸쳐 약 250만 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관찰한 결과가 실렸습니다. 이에 따르면, 초중고 시절에 훌륭한 선생님을 만난 학생은 10대 때의 임신 확률이 낮았고, 대학 진학률이 높았으며, 성인이 됐을 때 경제적으로 더 풍요로웠습니다. 때로는 삶을 포기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 놓인 제자를 살려내는 것도 선생님의 사랑입니다. 1학년 때 담임을 맡았던 고3 아이가 쓴 유서를 받아든 선생님은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6월 21일. 불안하고 살기 두렵다. 그리고 난 혼자다. 우울하다. (…) 후회하지 않는다. 즐거운 추억도 없다. 아름다운 추억도 없다. 예수는 나에게 관심도 안 준다. 난 오로지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사랑도 못 받았다. (…) 나의 생일. 그리고 탄생.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한창 밝은 미래를 꿈꿀 나이인데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길래 소년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고 갔을까요? 조선일보(2010년3월 13일)에 실린 그의 사연은 이랬습니다.

6월 21일은 그의 생일입니다. 생일날 죽겠다는 겁니다. 백일이 됐을 무렵 부모가 이혼해 엄마는 떠났고, 청각 장애를 앓던 아버지는 트럭 운전을 하며 전국을 다니고 있습니다. 아버지처럼 청각 장애를 앓는 소년은 칠십 가까운 할머니와 컴컴한 반지하 셋방에서 단둘이 삽니다.  할머니는 관절염으로 누워 계셔야만 합니다. 

선생님이 그의 집을 방문해보니, 이불 위에 먹다 남은 빵과 통조림통이 널려 있고, 곰팡이가 슬어 있었습니다. 싱크대에는 닦지 않은 그릇들이 수북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소년은 눈물을 흘리며 유서를 썼을 겁니다. 아무리 찾으려 해도 보이지 않는 희망을 내려놓는 순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죽음밖에 없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를 죽음의 덫에서 구해낸 것은 선생님이었습니다. 죽겠다면서 무단결석을 하고 있던 그의 중학교 생활기록부를 살펴본 선생님은 그가 음악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를 경찰서로 데려간 선생님은 이런 아이들을 치료하는 임시보호소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곳에 그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를 집으로 보내라고 해 소년은 다시 어두컴컴한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6월 21일. 선생님은 몇몇 선생님들과 소년의 선물을 사 들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가 사용할 휴대전화도 자신의 딸 이름으로 장만했습니다. 수시로 소년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밝게 웃으며 선생님을 맞이했습니다. 이렇게 그의 자살을 막은 선생님은 이때부터 소년의 자립을 위한 계획을 하나하나 실천해 나갔습니다. 먼저 소년의 자긍심을 높여줘야겠다는 생각으로 반 아이들에게 부탁했습니다. 응원 문자를 그의 휴대전화로 보내게 했습니다. 

그리고 동사무소를 찾아가 제도적으로 소년을 도울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아버지가 계신 탓에 보조금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안 선생님은 아버지를 설득해 소년을 단독 세대주로 만들어 보조금을 받게 했습니다. 곰팡이 슨 집을 옮겨주려고 교회 분들과 의논해 좀 더 나은 집으로 옮겨줬습니다. 중학교 때 소년은 대금을 배워 외국을 다니겠다는 꿈을 가졌었습니다. 그것을 안 선생님은 그에게 국악과에 지원할 것을 제의했고, 결국 그는 합격했습니다. 대학 입학금은 소년의 어머니와 교회분들이 도와 어엿한 대학생으로 거듭났습니다.

한 선생님의 사랑이 그를 살렸습니다. 한때 담임이란 인연으로 만난 소년을 2년이 지나서도 포기하지 않은 정원종 선생님의 사랑 이야기가 제 가슴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그가 유서의 끝에 "경찰 아저씨, 나의 시신은 화장해주세요"라고 쓸 만큼 힘겨웠던 삶이 이제는 자신만큼이나 힘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는 그를 그려봅니다. 이 땅의 모든 선생님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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