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91분 / 드라마 / 12세 이상 관람가

 

영화 ‘애플’은 단기 기억상실증이 전염병처럼 유행하는 세상을 배경으로 이름도, 집 주소도 기억하지 못하는 알리스가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알리스는 자신을 찾는 가족이나 친구가 나타나길 기다려 보지만 며칠이 지나도 찾아오는 이가 없다. 병원은 무연고 환자가 된 알리스에게 새로운 경험을 통해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을 제안한다. 그는 자전거 타기부터 낯선 사람과 성관계를 갖기까지 일상적인 경험을 쌓아가면서 이를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기록하는 미션을 받는다. 무표정한 얼굴로 미션을 수행해 나가던 알리스는 어느 날 자신처럼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안나를 만난다.

 기억상실증이 감염병처럼 유행한다는 기발하고 괴이한 상상에서 시작된 영화는 차세대 그리스 스타 감독으로 손꼽히는 흐리스토스 니코우 감독의 작품이다. 영화는 특별한 서사 없이 인간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본다. 기억상실증이 감기처럼 평범하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은 기이하지만, 알리스가 느끼는 혼란과 답답함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과거의 기억을 잃은 알리스는 무감각한 듯하지만 상실감과 외로움, 슬픔 등 감정의 조각이 늘 그의 곁을 배회한다. 관객들은 알리스가 미처 느끼지 못한 감정들을 직면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영화를 받아들인다.

 니코우 감독은 "관객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알리스가 느끼는 감정들을 함께 마주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며 "영화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기억의 산물이라면 슬픈 기억을 어떻게 다루면서 나아갈 수 있는지와 연결돼 있다"고 연출 의도를 설명했다.

 이런 점에서 영화 속 독특한 성격의 안나는 기억을 잃고 사라진 감정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는 인물이다. 두 사람은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통해 급속도로 친해지고 서로를 의지하지만 한순간 관계의 진정성에 의문을 던진다.

 인간의 기억과 정체성, 감정, 관계 등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을 완성하기까지는 8년이 걸렸다. 니코우 감독은 제작 단계에서 기억상실증이 바이러스처럼 퍼진다는 부조리한 세계관을 담은 대본으로 자금 투자를 받는 데 어려움이 컸다고 밝혔다. 26일 개봉. 

이창호 기자 ych23@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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