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녹음은 유월의 전령사다. 시방 주변은 온통 짙푸른 세상이다. 짙푸른 수풀 속에 묻히면 잎파랑이가 피톤치드를 뿜어내는지 숨통이 시원스레 트이는 것 같다. 누구는 녹음 우거지는 유월을 ‘성숙한 여인’이라 하고, 누구는 그것을 인생의 ‘장년’이라 했다. 신록의 오월을 유년이라 할진대 녹음의 유월은 ‘청장년’이라 덧붙여 본다. 

청장년의 색깔은 녹음 빛이다. 맑디맑고 싱싱하다. 녹음 빛에 휩싸이면 펄떡거리는 생명들이 우세두세 희망 찬 꿈을 노래한다. 녹색의 꿈-때마침 지난달 말엽에 열린 ‘2021 P4G 서울정상회의’가 범지구 차원에서 함께 이 꿈길에 어울렸다. 크게 보아 오염된 지구 환경을 녹음 빛 미래로 되살리자는 것인데, 우리네 인생 청장년의 건강한 꿈 세상을 펼치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녹음 빛에 휩싸이면 때로는 넓푸른 바다에 둥둥 떠 있는 듯 몽환세계에 잠길 수 있다. 저기 드높은 데서 여름하늘이 내려온다. 이내 마주한 그 호천(昊天)이 데리고 온 하얀 뭉게구름에 실려 함께 흐른다. 한창 생활전선에 여념 없을 청장년의 망중한이랄까. 

며칠 전 인적 드문 수락산 둘레길 가랑비 속, 녹음 빛 산행 초입에서 마주친 백장미 넝쿨 숭어리는 새삼 감격이었다. 그 흔한 여름 울타리 대표 꽃이 홍장미라면 백장미는 청장년의 개척 상징 꽃이라 해 본다. 망중한 가운데 ‘녹중백(綠中白)’은 어릴 적 그렸던 크레파스 정물화처럼 뇌리에 선명하게 꽂혀 있다. 

녹음은 또한 여름철 소리의 전령사다. 도회지 인근 산골짜기에는 아침이면 뻐꾹새가 울고 저녁이면 개구리가 운다. 유월을 소리로 알린다. 비가 잦아 뜸하게 찾은 골짝 텃밭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그 울음소리는 순정이요 옛정이다. 느닷없이 어릴 때 고향산천이 기억의 영상으로 마구 되돌아온다. 하나는 격정적 울음소리로, 다른 하나는 여정(餘情)적 울음소리로, 와 닿는 톤이 마냥 다르다. 도시 속의 시골, 도농일체(都農一體)의 순간이다. 복선과 단선, 혼성과 순수가 하나가 된다. 두 울음소리는 내 추억의 필름 속에 아련한 그리움으로 새겨져 있다. 그 그리움은 나만의 외로움으로 안겨져 사라지고 마는지… 

내 졸음 산문시 ‘녹음 빛 소리’의 일부 내용으로 이어 본다. "희부옇게 영마루를 지우면서 내려오는 비구름 안개가 흐르는 소리, 불현듯 허공을 비껴나는 멧새의 자취도 없는 날갯짓 소리, 장마철에 급속히 불어난 계곡 도랑물 소리, 산지사방으로 후비고 드는 골바람 소리, 이 모든 소리가 파동을 타고 스스로 하나로 어우러져 만들어낸 녹음 빛 소리, 푸른 색소의 입자들과 뭇소리의 파동들이 저절로 만나 지어낸 녹색 그늘의 화음, 어둡고 칙칙한 세상에 묻힌 몸뚱어리들이여! 드맑고 낭랑한 소리 없는 소리, 자연의 화성, 녹음 빛 소리를 들어보자. 아주 잠깐씩이라도 가끔은 솔 이파리 새순을 따서 씹을 때, 그 맛 그 향내 같은 녹음 빛 소리가 되어… 은은히 온 누리에 울려 퍼지게." 

돌이켜보면 그간 나는 신문 칼럼을 꽤 써 왔다. 청장년의 색깔 같은 녹음 빛 내용을 담고자 애썼지만 그때그때의 세상 주된 이슈를 반영하다 보면 전혀 다른 빛깔의 칼럼이 나오기도 했다. 상황에 따른 호불호의 차이일 뿐, 무조건 어느 빛깔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타오르는 횃불 빛이나 노년의 그레이 색상도 때로는 제격일 수 있다. 어쩌다 내 본뜻과 달리 언짢은 역반응에는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풀었다. 시시비비도 저편 이편이나 시대에 따라 판단 기준이 다르지 않은가. 

나는 그저 시를 짓는 평민이다. 오늘날 평민들은 중우(衆愚)가 아니다. 비록 주도적으로 비판이나 지적은 하지 않지만, 직감으로 나라 돌아가는 정황을 알고 있다. 우리네 살아가는 이 나라가 잘 되는 방향으로 가야지, 방관만 할 수 없지 않은가. 각자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하다가 국민주권 투표 행사 때에는 부정선거설을 초월해 여야 없이 늘 따끔한 맛을 보여야 녹음 빛 미래가 반긴다. 

이달은 혁희음생(赫曦陰生)의 ‘하지’가 들어 있다. 연중 양기가 다하면 음기가 들어선다는 것은 자연의 철칙이다. 우리 육신인생도 예외 없이 늙는다. 이와 달리 마음이 꼭 늙는 건 아니다. 마음이 청장년이면 녹음 빛으로 살 수 있다. 단시조로 되뇐다.

- 유 월 -

 녹음 빛 소리 따라
 뻐꾸기는 저리 울고

 

 해거름 막 이울 제
 개구리도 따라 울면

 

 청장년
 짙푸른 향연
 첫 여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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