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사람들은 자신만의 신념대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간혹 자신의 신념과 다른 상황을 마주할 때는 충돌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특히 종교적인 계율을 충실히 따르려는 사람의 눈에는 이 세상이 온통 혼탁한 곳으로 보일 겁니다. 「마음을 가꾸어 주는 작은 이야기」(이도환 저)에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진 두 사람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계율을 빈틈없이 따르는 수도승이어서 술도 못 하고 오전 11시 이후에는 어떤 음식도 먹지 않았습니다. 또 한 사람은 철학 교수로 종교적 계율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고, 일체의 고정관념을 거부하는 자유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수도승과는 달리 먹고 싶을 때 아무 때나 먹고, 잠이 오면 언제든 잠을 자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수도승이 교수를 방문했는데, 마침 술을 마시고 있던 교수가 웃으며 술을 권하자, 수도승은 마시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어찌 술맛을 모르는 사람을 인간이라고 하겠소?"라고 교수가 말하자, 수도승은 화를 내며 소리쳤습니다. "사람을 취하게 만들어 정신을 산란하게 만드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사람이 아니란 말이오? 그런 논리가 어디 있소? 내가 인간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오?"

 자유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을 할’ 자유와 ‘~을 하지 않을’ 자유가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두 가지 자유 중에서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하고, 그 순간 자신이 행복하다거나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즉, 자신이 선택한 자유를 누린다고 여기면 행복해하고, 그것이 구속돼 있다고 느끼면 불행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위의 사례에서는 술을 ‘마실’ 자유와 ‘마시지 않을’ 자유 중에서 교수는 ‘마실’ 자유를 구가하고 있어서 행복을 느꼈지만, 수도승은 자신이 선택한 ‘마시지 않을’ 자유를 누리지 못해 화가 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어항 속에 갇혀 사는 물고기는 행복할까요, 불행할까요? ‘물고기는 강에서 살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은 ‘불행하다’라고 여길 겁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세계적인 참선가인 아잔 브라흐마는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에서 어항 속 물고기는 무려 여섯 개의 자유를 누리고 산다고 말합니다. 어항 속에서는 낚시꾼의 위험으로부터의 자유가 있고, 안전한 먹거리가 있으며, 천적의 위험으로부터의 안전이라는 자유를 누립니다. 

 그리고 하루 두 번, 영양분이 고루 함유된 식사가 늘 준비돼 있고, 계절의 변화에 따른 극심한 온도변화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며, 병에 걸려도 치료해줄 존재가 있다는 자유가 있습니다. 어항 속 물고기가 가진 이 여섯 개의 자유는 정작 강에서는 가질 수 없는 축복일 겁니다. 물론 강에서 사는 물고기에게는 그것들과 상반된 다른 자유를 누릴 겁니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사느냐에 따라 행복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살든 그곳에 있는 자유를 구가하느냐가 행복을 결정합니다. 

 누구에게나 술을 ‘마시지 않을’ 자유와 ‘마실’ 자유가 있습니다. 동시에 술자리에서도 누구는 ‘마실’ 자유를 원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마시지 않을’ 자유를 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서로가 인정하고 허용할 때 철학 교수와 수도승 사이의 갈등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한 사람들이 갖는 삶의 태도이지 않을까요?

 ‘신념’이나 ‘계율’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도움을 주는 ‘수단’일 뿐입니다. 여기서 삶의 목적은 ‘행복한 삶’입니다. 신념이나 계율을 ‘지키는’ 자유도 있지만, 그것을 ‘어길’ 자유 또한 있다는 점을 놓쳐선 안 됩니다. 신념이나 계율을 ‘어기는’ 자유가 허용될 때는 계율을 지키면 ‘목적’을 구현할 수 없을 때입니다. 이렇게 ‘지키는’ 자유와 ‘어길’ 자유를 상황에 따라 적합하게 적용하고 누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이런 태도가 갈등과 다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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