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한여름은 먹장구름으로부터 온다. 대서·복날이 있는 칠월은 양기가 극에 달한 ‘하지’ 뒤끝이라 발악하듯 마지막 열기를 내뿜는다. 한여름의 상징 무더위다. 가뭄더위의 한열도 문제려니와 무더위의 끈적끈적한 불쾌감에는 밤새 뒤척이기 십상이다. 재작년에는 가뭄더위로, 작년부터는 대개 무더위로 올 칠월을 맞는다. 이즈음 지구촌은 이상 기온으로 몸살을 앓는다. 동토의 땅 모스크바가 30도, 북미가 50도 이상 불볕더위에 이른 반면, 우리는 동남아 아열대성 기후인 양, 기습 폭우의 무더위로 괴롭다. 먹장구름이 하늘을 밤낮없이 덮곤 한다.

 이 밤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인근 개천을 향한다. 잘 닦아놓은 천변길, 걷거나 개인용 탈 것으로 싱싱히 바람을 가르는 이들이 상당하다. 나도 자전거로 합세한다. 천변 둑방에 내 키만 한 억새풀 군락이 손짓한다. 망초, 원추리, 코스모스 같은 여름꽃들이 반긴다. 순간 무더위를 잊고 눈앞에 펼쳐지는 황홀경에 빠진다. 마스크의 답답함은 간데없다. 밟던 페달을 멈추고, 개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중간쯤에 서본다. 

 "끼악끼악…" 다리 아래를 지나 강물 위로 나지막이 나는 물새 한 쌍, 그들이 사뿐히 내려앉는 여울 물살 속으로 현란하게 춤을 추는 불빛기둥들. 들쭉날쭉 오색 찬연한 풍광들이 거꾸로 선 채 제각기 열연 중이다. 물결의 휘황찬란한 연출에 취해 나도 몰래 그 속으로 들어선다. 바닷속 용궁에 든 기분이다. 기둥들 아래로 장대한 산줄기들이 이합집산한다. 한데, 저 엄청난 동영상들이 펼쳐지는 스크린은 바로 하늘이 아닌가. 그때 고개를 든 것은 돌차간이었다. 

 우람한 북한산맥이 저만큼 눈앞에 에두르고 버텨 선 모습-중랑천 상류 현장에서다. 산맥 위로 변화무쌍하게 펼쳐지던 시커먼 동영상 산줄기는 실제 먹장구름이었다. 그 구름은 물속 산줄기의 환상인 셈이다. 갠 날 뭉게구름의 변화하는 모습도 다를 바 없다. 머리 위 밤하늘 한가운데, 어느새 엷어진 새털구름 사이로 별님 한둘이 눈에 밟힌다. 새삼 어릴 적 고향 여름 밤하늘에 무수히 쏟아지던 별똥별을 주우러 갈 단꿈에 젖는다.

 "바다에는 뭇 섬이 떠 있듯/하늘에는 구름 섬이 떠 있다/저 하늘을 오르고 올라보면/은하에는 별 섬이 무장 떠돌고/우주에는 은하 섬이 엄청 떠돈단다/섬은 섬으로 이어지고/이 바다 섬은 저 우주 섬으로 이어지리/생멸이 다 함께 떠도는 곳/세상은 또한 사람 섬으로 넘쳐나고/사람은 오만가지 생각 섬을 만들며 살아간다/만들어지고 부서지며 떠도는 그대, 낭인이여/이 세상 누군들 구름 섬 아닌 자 있으랴/생멸하는 구름 섬을 저 아니라 할 수 있으랴."

 졸저 「황홀한 적막」에 실린 자유시 ‘구름 섬 인생’이다. 오마이뉴스의 홍성식 기자는 이를 장자의 핵심사상 ‘무위자연’의 향취가 묻어나는 백미(白眉) 작품이라며 ‘인간의 삶’이란 외딴섬과 같아 슬프지만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라고 평한 바 있다. 서책 「장자」에 수록된 ‘호접몽’은 나비와 장주(莊周) 본인의 경계가 모호하다. 환상과 현실, 실체와 허상이 서로 넘나든다.

 칠월 무더운 밤에 땅의 물과 하늘의 구름을 벗 삼아 몇 시간만이라도 황홀한 꿈결에 잠겼더니… 아서라, 무더위는 사라지고 없다. 한여름 밤의 꿈이 영근다. 셰익스피어는 희곡  ‘한여름 밤의 꿈’에서 연인들 간 사랑의 갈등을 요정들의 힘을 빌려 해결하는 몽환적 이야기를 그렸다. 이는 멘델스존 작곡으로, 한국 가수의 노래로도 음악화됐다. 이쯤에서 보면 오늘날 문화·사회·경제 등 각 분야에 회자되는 ‘메타버스’가 클로즈업된다. 코로나19 팬데믹에 따른 비대면 추세라서 더 주목되고 있다.

 2천300여 년 전 장자의 ‘사람과 나비’, 400여 년 전 셰익스피어의 ‘인간과 요정’, 현 21세기 나의 ‘인생과 구름’이 모두 메타버스로 귀결된다. 현실과 환상은 시방도 시시각각 혼융되고 있다. 현실이 환상이요 환상이 곧 현실일진대, 실체라 생각하는 지금 이 자아도 환상일까. 지난 3월 모 신문에 2020년 말 기준 무연고 사망이 3년 새 58%에 이르는 등 청년고독사가 급증하고 있다 했다. 실로 안타깝다. 부디 무더위는 숙어지고 한여름밤 희망의 꿈들이 넘쳐나거라. 시조 올린다.

- 메타버스 인생 -

환상이 꿈이 되고
그 꿈 또한 실현될 때

 

 나비도 요정들도

구름마저 뛰쳐나와

 

인생길

함께 어울려
이상향을 세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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