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연 전 인천시약사회장/수필가
김사연 전 인천시약사회장/수필가

덕혜옹주는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갇힌 지 15년, 열네 살 때 일본으로 간 지 37년 만인 1962년 1월 26일, 51세의 나이로 대한민국에 환국했다. 저널리스트 김을한의 노력 덕분이었다. 운연궁의 마지막 안주인이었던 의친왕 이강의 차남인 이우 공의 비 박찬주가 차남 이종과 함께 일본으로 가 모시고 왔다.

 옹주는 하네다공항 특별기 앞까지 앰뷸런스로 모셨고 휴일 이른 아침임에도 궁내청과 외무성 관계자, 30년 전의 학습원 친구들 10여 명이 나와서 한 많은 일본을 떠나는 옹주를 눈물로 환송해 줬다. 그러나 옹주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고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 듯 눈만 껌벅였다.

 옹주가 탄 NWA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흰색 한복을 정갈하게 차려 입은 한 노인이 비행기를 향해 큰절을 올리며 "아기시!"를 부르고 목 놓아 울었다. 옹주에게 젖을 물려 키운 유모 변복동이었다. 운현궁의 친척들과 낙선재에서 순정황후를 모시고 있었던 상궁들, 의친왕의 6남 이수길, 준명당 황실유치원 동기생 몇 명, 일출소학교 유일한 한국 동창생 민용아와 진명여고 학생들이 꽃다발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옹주를 맞았다. 세월의 기억을 잊어버린 덕혜옹주는 운현궁 이우 공의 비 박찬주와 그의 차남 이종, 7촌 조카 이혜선, 김을한 기자의 부축을 받으며 트랩을 내려왔다.

 옹주는 낙선재로 환궁해 큰오라버니 순종의 부인인 순정효황후 윤씨에게 90도로 꺾은 자세로 반듯하게 절을 올렸다. 반면 박찬주에게는 바로 앉아서 고개만 까딱였다.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고 옆에서 누가 일러주지 않았는데도 황실 예법만은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는 옹주에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움과 존경의 눈물을 흘렸다. 옹주는 그 길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했다. 주변의 호의로 차츰 안면에 안도의 표정과 생기가 돌기 시작했으나 기억력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입원한 지 7년째가 되던 1968년 가을, 옹주는 자신의 집인 창덕궁 낙선재 궁역의 수강재로 돌아왔다. 간간이 기억이 되살아나는지 옹주는 궁원을 산책하다가 눈물을 흘리며 "마사에! 마사에!"하고 신혼 때 자살한 딸 정혜의 이름을 불렀다. 1983년 어느 날, 덕혜옹주는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오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옹주는 유모 변복동과 상궁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함께 화투를 쳤다. 겨울밤, 유모는 살그머니 수라간으로 가서 살얼음이 동동 뜨는 식혜를 한 대접 떠다가 옹주에게 드렸다. 옹주가 고종황제를 닮아 살얼음이 동동 뜬 식혜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상궁들은 태황제가 좋아하는 식혜에 청량한 맛을 더하려고 인왕산 바위 틈새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석수를 받아다가 식혜를 담갔다고 한다. 

 세월은 흘러 스무 살 위의 유모가 가엾은 아기시를 남겨 두고 못내 감기지 않는 눈을 감았다. 이어 한평생을 궁전에서 보낸 상궁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하직했다. 낙선재엔 정략결혼으로 일생을 바친 영친왕 의민 황태자비 방자(마사코)여사와 옹주만 남았다. 흥선대원군 증손주 며느리로 큰아들 이청 내외와 운현궁을 지키고 있던 이우 공 비 박찬주가 가끔 옹주와 방자 여사를 찾아줄 뿐이었다.

 덕혜옹주는 1989년 4월 21일 오전 11시 40분, 낙선재 일곽의 수강재에서 77세로 끝내 무거운 말문을 트지 못한 채 한 많은 생을 닫았다. 그나마 일본의 정신병원이 아닌,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아바마마의 궁궐로 환궁해서 예우를 받으며 생을 마친 것만도 다행이었다. 전주이씨 대동종약권 주관으로 엄수된 덕혜옹주의 유해는 남양주시 금곡동, 고종황제와 적모이신 명성황후, 그리고 큰오라버니 순종황제와 두 분 황후, 먼저 떠난 작은오빠 영친왕이 잠들어 있는 홍유릉의 부속림에 안장됐다.

 실어증에 걸려 말 한마디 못 하는 영친왕을 따라 영구 귀국한 방자 여사는 "내가 살 곳도 대한민국이요, 내가 묻힐 곳도 대한민국"이라고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장애인의 어머니로,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일본인으로 칭송받은 이방자 여사도 덕혜옹주가 떠난 후 9일 만에 89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방자 여사는 고종황제 일가의 능원이 있는 금곡 홍유릉 영친왕 이은 곁에 합장됐다. 이로써 정략결혼의 피해자였던 두 여인의 삶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참고 문헌:안윤자 저서 「구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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